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박정희 친필 극비 메모 받고 미사일 착수… 美 반대 엄청났다"

화이트보스 2012. 7. 20. 14:55

"박정희 친필 극비 메모 받고 미사일 착수… 美 반대 엄청났다"

  • 조백건 기자

  • 입력 : 2012.07.20 03:32 | 수정 : 2012.07.20 07:06

    [국산 미사일 '백곰·현무' 이끈 구상회 前 국방과학硏 부소장]
    "美 대사·차관보까지 와서 중단 요구했지만 겨우 설득…
    5共 초기 우수 인력들 해직, 아웅산 테러 이후 개발 재개"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현무-1, 현무-2 탄도미사일의 정확도는 선진국 수준으로 북한과 비교가 안 된다."

    1970~1980년대 '백곰' '현무' 등 국산 지대지(地對地) 탄도미사일 개발을 이끌었던 구상회(77·사진)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은 "한국의 미사일 기술은 급속한 경제 성장만큼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구 전 부소장은 "1971년 12월에 청와대로부터 호출을 받고 들어갔더니, 당시 오원철 제2경제수석이 대통령의 친필로 된 극비 메모를 건네줬다"며 "메모에는 '1975년까지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도 사거리 600㎞의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는데, 관련 기술과 인력이 전무(全無)한 상황에서 4년 안에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만들어 내라는 명령이었다"고 했다.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사항이라 그를 비롯한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당시 보안사령부가 마련해 준 안가(安家)에서 미사일 개발 계획을 짰다고 한다. 구 전 부소장은 "보안사 안가인 아파트 안에서 24시간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채 계획을 수립했다"며 "기본적인 미사일 개발 자료조차 없어 미국과 유럽 국가의 일간지나 잡지에 난 미사일 기사들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972년 5월 자료 부족에 허덕이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 국방부로부터 방위산업 교육을 위한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등을 방문해 미국의 방대한 미사일 개발 자료를 얻었고, 미사일 개발에 필수적인 관성항법장치 하나도 운 좋게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해 9월 '항공공업계획'이라는 제목의 계획안을 청와대에 올렸고, 이후 "1978년까지 미사일 개발을 완료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구 전 부소장은 "미사일 개발은 1950년대 미국이 개발한 나이키 허큘리스(NH) 미사일을 참고하되 내부 추진체, 전자회로 등을 대폭 개량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다. 그는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에서부터 주한 미 대사, 미 국방부 안보 담당 차관보까지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며 "필사적인 설득 작업 끝에 사거리 180㎞, 탑재 중량 1000파운드(453㎏) 이내의 미사일 개발을 양해받아 1978년 최초의 국산 미사일인 '백곰'을 시험 발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곰'이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미사일을 본뜬 것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당시 미사일 개발에 참여한 부장급 이상 간부가 전원 '숙청'됐다"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직후 미사일 개발사업이 재개됐고, 이후 탄생한 것이 현무-1 탄도미사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