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동 총성’ 석달뒤 박근혜 일기에는
“소신 펴 나갈 때 욕 안먹을 수 없어”
등록 : 2012.07.15 19:00 수정 : 2012.07.1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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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식을 열고 선언문을 낭독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
[2012 대선주자 탐구]
박근혜 ① 역사관과 통치관
“5·16과 유신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을것”
“역사에 판단 맡겨야” 신념 바뀐적 없어
새누리당이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할 후보 등록을 마감하고 21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다. 뒤이어 민주통합당도 후보 경선에 들어갈 예정이다. 12월19일 치러지는 18대 대통령선거전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는 것이다. <한겨레>는 주요 대선주자들을 심층 조명하고 그를 둘러싼 의혹을 점검하는 ‘대선주자 탐구’ 시리즈를 시작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건,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을 선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대선주자 탐구’의 첫번째로, 지지율 1위인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 탐구를 4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어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김태호·임태희·안상수 새누리당 경선후보를 조명하는 기사를 싣는다. 민주통합당 경선이 본격화하면,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심층취재 기사도 계속 실을 예정이다.
2007년 1월23일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사형 당한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 대변인도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진 것이 큰 다행”이라며 “이 사건으로 고인이 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국민의 시선은 박근혜 의원(이하 호칭 생략)의 입을 향했다. 그는 침묵했다.
박근혜는 그보다 1년여 전 한 인터뷰에서,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발표에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낸 바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1974년 4월 유신 반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재건위가 있다며 중앙정보부가 23명을 기소했던 사건이다. 사법부는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 15명은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이듬해 4월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사형이 확정된 8명은 재판 뒤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많은 이들은 인혁당 사건을 두고 “유신체제에서 ‘권력의 시녀’가 돼버린 사법부가 박정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2년 9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고, 같은해 12월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면서 결국 무죄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부터 그는 “법적으로 결론이 난 사건 아니냐”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형이 집행됐던 1975년 4월은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32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나오자 그는 “법원에서 정반대의 두가지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뭐가 진실인가. 역사적 진실은 한가지밖에 없다”며 “역사가 앞으로 밝혀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5·16과 유신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을 것”
박근혜는 박정희의 유신과 5·16 쿠데타 에 대해 ‘역사가 평가할 것’이란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80개가 훨씬 넘는 나라들이 독립을 하거나 새로 탄생을 했다. 그 많은 나라들이 이른바 군사독재 정치를 겪었다. 그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개발에 성공을 한 나라”라고 말했다.
며칠 뒤 방송토론에선, 5·16에 대한 찬반 논란을 고려-조선 왕권 교체기에 빗대기도 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대해 포은 정몽주 선생과 세종대왕의 평가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나? 두 분이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성계, 자신은 세종대왕, 그리고 박정희 시절의 희생자들은 정몽주로 비유한 셈이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정몽주를 제거한 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일파였고, 세종대왕은 이방원의 아들이었다.
박근혜는 박정희가 주도한 5·16과 유신이 각 시점의 한국에 반드시 필요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1989년 <문화방송> 인터뷰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 과연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나?”라고 물었다. 더 나아가 4·19의 결과로 꾸려진 정부를 전복한 5·16이 오히려 4·19 정신을 계승했다는 주장도 펼쳤다. “4·19의거는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희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5·16혁명도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 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 후 그 혼란의 와중에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나?”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 때 “5·16은 구국혁명이었다. 유신 체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던 발언도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박근혜가 5·16과 유신을 옹호하는 발언을 내놓으면 비판 여론이 들끓곤 했다. 민주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뒤엎은 쿠데타와 박정희의 ‘종신독재’를 가능하게 한 유신을 옹호했다며, 박근혜의 민주주의관과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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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의원이 지난 2월21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개관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ㆍ도서관을 돌아보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을 쳐다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박근혜도 5·16 및 유신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지점을 이해하고는 있는 듯하다. “만약 아버지가 그때 총탄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유신체제를 끝내고, 대통령에서 물러나셨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아버지께서 유신헌법에 대해 개정하는 방향으로 수석비서관에게 연구 지시를 했고, 스스로도 물러나실 준비를 하셨고, 식사 시간 대화에도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됐으면 좋겠냐고 저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일들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나온 이 발언은 ‘종신독재’에 대한 비판을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 해도 각 시점에 사회적 불안, 북한의 위협 등 때문에 5·16과 유신 결단은 불가피했다는 게 박근혜의 주장이다.
“(5·16 무렵엔) 그때 상황이 너무나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간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우리가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 혁명규약에 보면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아선상에 헤맸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 했다. 그런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려면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1989년 문화방송 인터뷰)
■ “소신 펴는 과정에서의 비난은 훈장 이상”
박근혜는 ‘정쟁’, 곧 정치권의 반목과 갈등이 5·16이나 유신을 불가피하게 만든 결정적 요소였다고 꼽는다. 박정희 추모 사업의 일환으로 박근혜가 1990년 제작한 영화 <조국의 등불>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외교·문화·안보 등의 치적을 두루 자랑하며 박정희를 미화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5·16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4·19 이후) 서투른 민주주의가 뿜어내는 공해로 인해 정치는 표류하고 세상은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나라 살림보다는 내 살 길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나라를 보살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은 젖혀놓고, 주먹질로 세상을 잡으려고 아우성치는 것이 정치 1번가의 풍경이었다.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다.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어려움을 헤아려주는 청렴한 정치인을 고대했다. 1961년 5월16일 은인자중하던 군부가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드디어 궐기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토론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그래야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잡음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가 ‘정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5·16이나 유신은 민주주의의 기회를 뺏은 역사이고, 그 책임은 박정희에게 있으며,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당성을 보완하고자 정치인들에게 ‘당쟁만 일삼는 것들’이란 혐의를 뒤집어 씌워 책임을 미룬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추진력을 강조하는 태도는 박근혜가 쓴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10·26 석달 뒤인 1980년 2월7일의 일기다.
“소신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욕을 안 먹을 수 없으니 그 비난은 가슴에 다는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설거지 하는 것만큼이나 욕먹지 않고 일하기는 어렵다. 일 잘하고 나서 그릇 한두개 깬 것만 가지고 욕을 하는 풍토라면 그 나라는 많은 애국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수많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장기집권을 이어갔던 아버지의 통치관을 이어받은 셈이다.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하여, 한-일 국교회복, 포항제철 건설과 월남 파병 등 하나에서 열까지 그 굵직굵직한 나라의 큰일들이 심한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당대에 박수받는 법을 모르셨겠는가. …국가를 보위한다는 것은 대통령 취임선서에도 첫번째로 나오는 국가 지도자의 엄숙한 임무인데, 그 임무수행에 혹여 차질을 빚었을 때 역사 앞에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1989년 <한국논단> 기고문)
박근혜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박정희 정권 시절 탄압받았던 피해자들과의 접점을 서서히 늘려왔다. 박근혜는 2004년 8월 박정희의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를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2007년 7월엔 유신 시절 의문사한 언론인 장준하의 부인을 만나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박근혜의 사과 대상은 20년째 비슷한 표현이 반복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이라고도 했고,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셨던 분들, 희생하고 고통을 받은 분들”이란 표현도 있다. 박근혜의 사과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또 ‘본의 아니게’라는 표현이 초래한 논란에서 보듯이, 박근혜의 사과는 진정성 논란을 불러오기 일쑤다. 아직까지 5·16이나 유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2003년 6월 <신동아> 기고문에서 자신이 정치에 나선 이유를 “아버지 때 못 이룬 이 나라의 민주정치를 꽃피우기 위해” 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소신이 여론과 충돌할 때 “비난을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러워 한다면 과연 민주정치가 꽃피는 세상일까?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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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일기 주요 대목
소신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욕을 안 먹을 수 없으니 그 비난은 가슴에 다는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설거지 하는 것만큼이나 욕먹지 않고 일하기는 어렵다. (1980년 2월7일)
혹한·혹서가 오래가는 법은 없다. …한 겨울에 봄이 올 것이라고 느끼기는 어려우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1980년 2월11일)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발로 설 수가 없다. (1981년 3월5일)
영웅으로 키우신 그 뜻이 바로 영웅적인 죽음까지 마련하신 것은 아닐까. 평범한 죽음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981년 10월19일)
유신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1981년 10월28일)
1970년대의 노력과 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민족의 설 땅이 과연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1985년 7월26일)
죽은 후에는 왕조차도 금세 잊혀지겠지만 사회를 위해 일한 사람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 (1985년 9월28일)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한해이다. 1980년대는 다시 돌아다보기도 싫은 소름끼치는 연대라고 느껴지는 것. (1989년 12월30일)
화염병을 던지며 반항하고, 선배 알기를 개떡만도 못하게 생각하고 온통 도덕, 질서, 가치관 등을 뒤죽박죽으로 뒤집어 놓은 오늘의 이 현실은 그동안의 역사 왜곡으로 인한 기성세대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이 사회는 지금 단단히 치르고 있는 것. (1990년 5월15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