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한국의 100대 명산

월출산(1)

화이트보스 2012. 8. 3. 11:48

월출산(1)
음양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氣通찬’산
달의 기운이 충만한 작은 금강산... 거대한 수석덩어리로 곳곳에 `부처바위`

▲ 여근 남근 합체석.
월출산(月出山)은 달나라다. 산 기슭의 마을 이름들도 월산리, 월흥리, 월평리, 월강리, 월봉리, 월곡리, 월남리, 월하리, 월송리 등 온통 달 투성이다. 그렇게 월출산은 달을 끌어들이고 있다.

달빛 휘황한 월출산은 남원(南原)의 지리산(智異山), 장흥(長興)의 천관산(天冠山), 부안(扶安)의 능가산(楞伽山), 정읍(井邑)의 내장산(內藏山)과 더불어 호남(湖南)의 5대 명산이다.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명산이다. ‘작은 금강산’으로 여기면 틀림없다.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솟아 있다. 백제와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적에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리다 조선 시절부터 월출산으로 굳어졌다. 물론 어느 시기에나 달(月)이 성(姓)처럼 붙어 있는 ‘달 뜨는 산’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은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국보 144호)이 있는 산이 월출산이다. 높은 곳에 있을 뿐더러 불상의 자체 높이만 8.6m에 달하는 거인이다. 각진 얼굴, 반쯤 뜬 듯 감은 듯한 눈, 부푼 볼,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해를 향하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 장대한 몸집에는 나발(螺髮)이 있다. 귀는 치렁치렁 어깨까지 닿는다. 목은 짧고 어깨는 건장하다. 허리는 잘록하다. 통견의(通肩衣)를 통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왼손바닥은 하늘을 보면서 무릎에 얹혀있다. 몸보다 얼굴이 유독 크다. 얼굴에는 머리가 있고, 머리 속에는 뇌가 있다. 인체를 가리키는 오장육부(五臟六腑)라는 용어에서 두뇌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몸짱’ 권하는 사회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마애여래좌상이 일찌감치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영(靈)과 육(肉) 중 우선이 바로 영이라는 메시지다.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天皇峯)은 해발 809m다. 낮은 편이나 주변에 큰 산이 없다. 들판에서 갑자기 용솟음친 산이라 체감 위용은 상상 이상이다. ‘산도 아닌 것이, 들도 아닌 것이’를 한참 달리다보면 난데없이 앞을 가로막는 게 월출산이다. 의표를 찌르는 입지 탓에 현실의 산 같지 않다. 영화 촬영용 세트가 떠오른다. 마애여래좌상으로 가는 길 양쪽 바위들의 조형성이 인위적이랄 정도로 탁월해 더더욱 그렇다. 거대한 돌덩이 전체가 곧 봉우리를 이루는가 싶다가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돌탑이 따로 없다. 절리층(節理層)이 쌓은 자연의 탑꼴이다. 다시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번에는 새가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려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부리를 쳐들고 있다.

이렇듯 월출산은 자체가 거대한 수석(壽石) 덩어리다. 산수경석(山水景石), 물형석(物形石), 무늬석, 색채석(色彩石), 추상석(抽象石), 전래석(傳來石) 등이 구석구석에서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각한 돌공원과도 같다. 게다가 부처의 얼굴을 닮은 바위가 유난히도 많다. 월출산의 별명 중 하나인 천불산(千佛山)의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에 기기묘묘한 소나무까지 보태진다. 확대한 분재(盆栽)나 다름없는 소나무들이다. 월출산을 조물한 주인을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멀리서 신기루처럼 윤곽을 비칠 뿐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재주는 없다. 대신 메아리가 돌아올 정도로 소리쳐 묻는다. 당신의 정원 겸 놀이터로 월출산을 조경한 게 아니냐고. 신기루는 소이부답(笑而不答), 그저 웃음 지을 따름이다.

‘부처의 가든 힐’과도 같은 월출산인 만큼 이 산에 절(寺)을 지은 승려들의 면면은 예외없이 톱스타다. 도갑사(道岬寺)는 신라 말기에 영암 태생인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 등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의 시조인 도선의 영향력은 현 시점에도 유효하다. 무위사(無爲寺) 역시 신라 고승 원효(元曉)의 작품이다. 무위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존재는 본존불(本尊佛) 탱화(幀畵)들이다.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그린 그림들이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법당 안을 엿봤고, 파랑새는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입에 붓을 문 채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새였다. 탱화 속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가 없는 이유다.

월출산만큼 음양(陰陽)의 조화가 완벽한 산도 드물다. 남성처럼 굳고 꼿꼿하게 돌출한 사자봉(獅子峯) 등 암봉에 압도당하다가도 억새밭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금세 포근해진다. 구정봉(九井峯) 주변 봉우리들은 오밀조밀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월출산은 역(易)의 괘(卦) 가운데 하나인 지천태(地天泰)를 몸으로 입증하고 있다. 아래서 올려보면 남성이요, 위에서 내려보면 여성이다. 양기는 위로 친해지려 하고 여자의 음기는 아래로 친하려 든다. 음양의 기운이 화창해 만물이 소생한다. 남녀가 만나 뜨거운 물을 분출한다. 월출산 온천의 효험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피로 회복, 신경통, 류머티즘, 알레르기성 피부염, 만성 습진, 심장병, 피부병 등 월출산 온천의 효능은 곧 남녀간 교류로 치유 가능한 질환 일색이다. 한마디로 ‘기똥(氣通)찬’ 산이다.

기독교의 도래 이전, 이 땅의 신앙이란 곧 불교와 도교 그리고 무(巫)다. 월출산이 속한 지명에서부터 영기(靈氣)가 발산된다. 영암(靈岩), 신령스러운 바위 덩어리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암이라는 땅이름이 월출산의 바위에서 유래했음은 자명하다. 월출산 꼭대기에 오르려면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해야 한다. 등산이 아니라 비상(飛上)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바위 굴을 벗어나면 거기에 달나라, 하늘이 있다. 정상에는 월출산 소사지(小祀址)라는 제단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국가 차원의 천제(天祭)가 올려지던 곳이라는 표지다. 영험하지 않는 곳에 제천의식(祭天儀式)이란 있을 수 없다.

바람재를 지나 발길을 재촉하면 구정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조금만 더 걸으면 베틀굴이 등산객을 놀라게 한다.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야수와도 같은 형상이다. 임진왜란 때 이 굴로 피란한 여인들이 베를 짠 곳이다. 굴 속으로 들어가면 여성의 음부 형상 바위가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낸다. 음굴(陰窟), 음혈(陰穴)이 베틀굴과 동의어인 까닭이다. 베틀굴 바로 위 구정봉은 생명력 강한 여인 아홉이다. 다산(多産)과 풍요를 약속하는 웅덩이 9곳에 물이 괴어 있다. 전설은 ‘월출산 구림 마을의 동차진이라는 남자가 구정봉에서 하늘을 깔보는 언행을 하다 옥황상제에게 벼락을 아홉 번 맞고 죽었다’고 돼있다. 그러나 동차진의 영가(靈駕)가 고백한 진실은 ‘성인용’이다. 어리고 젊은 처첩을 아홉이나 거느리고 이곳에서 방탕한 짓을 벌이다 날벼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주위 풍광은 곧 도원경(桃源境)이요,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다. 돈 많은 한량이라면 능히 침소를 벗어나 자연의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했음 직하다.

월출산의 영기(靈氣)는 만월(滿月) 즈음에 절정으로 치닫는다. 동시에 월출산 자락의 예민한 이들은 온몸의 물(水)이 빨려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심한 보통사람은 불안해지지만, 민감한 남녀는 월출산을 비추는 보름달 빛에서 영적(靈的) 에너지를 섭취한다. 다음 번 음력 15일은 언제인지, 달력을 체크해 볼 일이다.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출처 : 주간조선 2006.2.13 1891호

 

[영기로 본 산하기행(18)] 월출산(2)
하늘이 빚은 신선의 휴식처
큰 인물을 낳는 바위 세 개 있어... 백제의 왕인과 고려의 도선국사가 영암 태생

▲ 월출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월출산(月出山·809m)을 ‘남쪽에 제일 가는 그림 같은 산’이라 읊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산중신곡(山中新曲)’에서 ‘선경(仙境)’으로 묘사한 곳 또한 월출산이다. ‘그림’과 ‘신선의 풍광’이란 곧 영기(靈氣)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가 3개 있었다. 월출산 자락의 마을에서 큰 인물을 배출토록 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대던 돌들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 두려운 중국인들이 발본색원(拔本塞源) 차원에서 월출산으로 숨어들어 바위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세 바위 가운데 하나가 굴러내려 멈춘 곳이 영암(靈岩)이다. 자리만 옮겨졌을 뿐 영기는 그대로 머금은 돌덩이다. 왜국(倭國)에 선진 문물을 전한 백제(百濟)의 학자 왕인(王仁)과 신라(新羅) 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영암 태생인 것과 무관치 않다. 왕인과 관련한 기록은 우리나라에 없다. 하지만 일본은 왕인을 아스카(飛鳥) 문화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왕인의 공적을 기리는 공원, 묘와 석비, 신사 등이 도처에 널려 있다.

겨울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은 뒤 배가 불러 낳은 아기가 도선이다. 도선 출생 후 12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야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명제가 참이 되기에 이르렀다. 황우석 박사가 처녀생식의 가능성을 논문으로 입증한 덕이다. 그러나 도선의 시대에는 경(墨刑)을 칠 일이었다. 어머니는 신생아 도선을 대나무 숲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기였다. 비둘기와 독수리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했다. 갓난아기 도선이 버려졌던 숲은 구림촌(鳩林村), 즉 비둘기 숲 마을이다. 아기를 뉘었던 돌 이름은 국사암(國師巖)이다.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유감주술(類感呪術)상 오이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오이가 영암의 특산물 중 하나라는 점도 전설이 오이를 택하는 데 일조했다.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峯) 동쪽 바람골에 터를 잡은 천황사(天皇寺)는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천황사 위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가 있다. 길이가 52m에 달한다. 이번에도 ‘오이’다.

도선이 월출산에 세운 절이 도갑사(道岬寺)다. 도갑사의 ‘도선수미 비문’(道詵國師 守眉大禪 碑銘)도 도선의 ‘아버지’가 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머니 최씨(崔氏)가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에서 도선을 낳았다고 새겨 놓았다. 성(聖)스러운 기운이 일어나는(起) 산(山)이라 해서 성기산이다. 중국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생아 후직은 기러기들이 보살폈다. 산천의 정기를 받고 숙기(淑氣)를 모아 태어난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일체의 속진(俗塵)에서 벗어난 것과도 같다.

도선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짚었다. 국토 전체를 배(船)의 꼴로 요약한 것이다. 그래서 배의 수미(首尾)를 진압한다는 의도로 절을 짓고 탑을 세우게 했다. 왕건(王建)의 아버지에게는 명당 양택(陽宅), 즉 집터를 잡아줬다. 온통 눈 천지가 돼도 왕건의 집만큼은 보송보송했다. 왕건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송악(松嶽)을 왕도(王都)로 점찍으며 500년 국운을 보장했다.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달통한 반신(半神) 도선은 월출산에서 불국(佛國)을 봤다. 겹산과 절경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들을 천불상(千佛像)으로 파악했다. 어구(魚口)의 주변 경관은 문수(文殊)의 지시를 받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을 친견, 법문을 듣는 모습이었다. 구름으로 창을 내고 안개로 집을 지었다. 십이루(十二樓)에서는 해조음(海潮音)과 범음(梵音)이 흘러 나왔다. 풍번(風幡)은 광명을 발산,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조명했다. 도선은 현세로 나들이 한 과거의 여래(如來)였다.

비문은 계속된다. ‘분별지해(分別知解·그대로는 생각도 말라) 식심분별(識心分別·쉬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글자 새긴 비문이야 있든 없든 도선국사의 큰 업적에는 손익(損益)이 없다. 무상광음(無常光陰)이 흐를수록 더욱 높아서 천만겁(千萬劫)이 지나도 옛 것이 아니도다. 아울러 비명(碑銘)은 도선이 월출산의 아들임도 적시하고 있다. ‘기암괴석(奇岩怪石) 영산(靈山) 월출산이 신인(神人)을 낳았다. 그는 강신(降神)으로 태어났다’고.

▲ 월출산 남근석
월출산은 하늘이 빚은 신선들의 휴식처다. 달랑 산만 있는 게 아니다. 나무와 바위는 물론 청량한 물(水)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정원이다. 영암호는 1996년에 준공된 간척 호수다. 산은 양(陽), 물은 음(陰)이라는 상식과 우선 부합한다. 겨울 철새 35종의 보금자리요, 전국 유일의 갈치 낚시터다. 영암이라는 땅이름의 위력이다. ‘암(岩)’만으로는 물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영(靈)’ 덕분이다. 영기는 시공을 초월해 작용하는 법이다. 토왕(土旺), 즉 흙기운이 왕성한 이 지역에 영험한 선인들은 ‘영’이라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운을 덧입혔다. 영기는 토왕에 그칠 뻔했던 곳에 수왕(水旺)을 보탰고 결국 영암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완벽한 균형을 갖춘 명당으로 악운을 막기에 이른 것이다.

바닷가나 강가에 거주하는 남녀는 덥거나 건조한 운명을 타고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운세가 습하거나 차가운 이가 물가에 살면 질병을 앓거나 실패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사주팔자가 덥고 건조하다면 습하고 찬 데가 길지(吉地)다. 차고 습한 선천명운(先天命運)에게는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 적격이다. 냉한 사주에게 열기를 내는 운이 오면 길운, 축축한 사주가 마른 운에 놓여도 길운이다.

이 같은 분석은 그러나 영암에서만큼은 무의미하다. ‘보름달 빛을 어깨로 받으며 야간산행에 흠뻑 젖어보자’는 식의 낭만을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산이 월출산이다. 밤은 영혼의 세상이다. 특히 심야의 산은 온갖 기(氣)를 뿜어댄다. 개중에는 사기(邪氣)도 있다. 월광을 만끽하며 한껏 고양된 뇌파가 사악한 기운의 주파수와 일치하는 찰나, 덜컥 빙의(憑依)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보름달이 뜨면 정신이상자가 늘고 범죄도 잦아진다는 현상 이면에 숨은 영기를 감안해야 한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사냥꾼 오리온을 전갈의 독으로 죽였다. 그녀에게 잔인하게 당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다. 보름달은 늑대인간의 출현 신호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은 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달의 공전주기와 일치하는 것이 여성의 생리주기, 월경(月經)이다. 달에서는 가끔씩 지진(月震)도 일어난다. 월진의 파장이 쏟아지는 달밤에는 보신(保身)과 보령(保靈)에 애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월출산에서는 달(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영(靈)’의 파워다. 타고난 운명이 무엇이든 월출산과 영암의 달 기운은 그 또는 그녀에게 무해(無害)하다.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출처 : 주간조선 2006.2.20. 1892호

 

[영기로 본 산하기행(19)] 월출산(3)·끝
“금강산 정기를 고스란히 품었네”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 배출... 돌과 뼈로 그린 동양화 한 폭

▲ 바람폭포
월출산(月出山·809m)은 영암(靈巖)이요, 영암은 월출산이다. 월출산은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산’이다. 월출산의 옛 이름 가운데는 ‘월나산’도 있다. ‘달(月)이 나오는 산’이다. ‘나온다’는 것은 곧 ‘출(出)’ 또는 ‘생(生)’이다. 영암의 옛날 지명도 ‘월나(月奈)’였다. 영암과 월출산이 동의어인 이유다.

월출산은 금강산(金剛山)이기도 하다. 증산교(甑山敎)의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姜一淳)이 산운(山運)을 옮긴 덕이다. 증산은 백두산(白頭山)의 기운을 뽑아 한라산(漢拏山)으로 옮겼다. 이어 덕유산(德裕山)에 뭉쳐있는 기운을 뽑아서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긴 다음, 금강산의 기운을 뽑아 월출산으로 옮겼다. 백두산에 천지(天池)가 있듯 한라산에는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일만이천봉으로 이뤄진 금강산처럼 월출산에서도 일만이천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금강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품은 ‘복제 금강산’이 월출산인 셈이다.

월출산은 신비다. 월출산이 낳은 고려국사(高麗國師) 도선(道詵)은 오이에서 비롯된 생명이다. 도선의 어머니는 오이를 먹고 도선을 회임(懷妊)했다. 빛으로 변신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는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주몽(朱蒙)을 잉태시켰다. 그래서 도선은 땅, 주몽은 하늘의 아들이다. 주몽의 영가(靈駕)는 어찌 들으면 함경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주문이다 싶은 말로 필자에게 ‘월출산의 500년 주기설’을 귀띔했다. 주몽은 은빛 옷에 금·은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었다. 움직여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머리에 꽉 맞춘 관이다. 주몽의 영가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출현했다. 말발굽·말울음 소리, 몇 백 명이 빠르게 걷는 소리도 들렸다. 신하들은 대부분 무장한 군인이었는데 뜻밖에도 조그만 활을 갖고 있었다. 어른 팔길이보다 약간 긴 정도였다. 강궁(强弓)이라고 해 엄청 큰 활만 상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주몽은 유독 ‘500년’을 강조했다. 왕인(王仁) 이후 500년이 흐른 뒤 도선을 등장시켜 한 시대를 풍미하게 했듯이 월출산은 500년 단위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의 오늘을 살고 있는 ‘500년 주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주몽은 “2006년에 태어난 아기는 아니다. 새 시대의 주역이 될 월출산인은 이미 장년으로 접어들었다”고까지만 말한 뒤 함구했다. 유명풍수가 손석우(孫錫佑)의 영가도 “월출산에서 황제가 난다. 475년간 계속되는 나라를 건국할 인물”이라며 생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는 인물이 월출산에서 난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손석우는 “음택(陰宅) 명당, 즉 아주 좋은 묏자리가 월출산에 숨겨져 있다”고 강조할 뿐이다. 그렇다고 월출산에 조상을 암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월출산은 속인이 묻힐 곳이 아니다. 이곳은 신선들의 리조트일 따름이다.

월출산은 두 얼굴의 별천지다. 영암에서 바라보면 악산(惡山)이다. ‘나쁜 산’이 아니라 ‘산세가 험한 산’이다. 강진(康津) 등 해안 쪽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고 순한 모습이다. 영암의 월출산은 돌과 뼈로 그린 동양화 한 폭이다. 강진의 월출산은 흙이 풍성한 육산(肉山)이다. 흙산은 재물, 돌산은 인물을 허락한다. 영암에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고, 강진 등지가 부호(富豪)를 대거 배출하고 있는 원인이다. ‘인물과는 인연이 없어도 부자는 많다’는 게 강진의 자긍 겸 자조다. 천불산(天佛山), 만덕산(萬德山), 억불산(億佛山), 그리고 조산(兆山) 등 어마어마한 돈의 액수가 땅이름으로 굳은 곳이 강진 주변에 유난히 많다. 영암에서 인물 자랑을 해서는 안된다. 월출산 북쪽의 영암은 바둑황제 조훈현(曺薰鉉)을 낳았고, 남쪽의 강진에서도 바둑의 명인 김인(金寅)이 나왔다. 조훈현의 바둑은 자유롭고 신묘하다. 김인의 기풍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월출산이 점지한 인걸들의 면면 또한 월출산 두 얼굴의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월출산의 이러한 양면성을 고루 흡입한 인물도 있다. 고려 초기의 문신 최지몽(崔知夢)이 대표적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했을 뿐더러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 18세 때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해몽 요청을 받고 “장차 삼한(三韓)을 통합해 다스릴 길조”라고 풀었다. 매우 기뻐한 태조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지몽, ‘꿈을 안다’는 의미다. 최지몽은 영암 구림(鳩林) 마을 출신이다. 버려진 갓난아기 도선을 비둘기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한 이후 붙여진 지명이다.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도 구림마을에서 글을 익히며 성장했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하며 촛불을 끈 한석봉 어머니의 타이름이 있던 곳도 구림마을이다.

구림은 월출산에서 날아온 씨앗이 꽃으로 피어난 형국이다. 꽃은 배꽃이 적당하다. 달빛을 받고 있는 배꽃이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와 딱 맞아떨어지는 월출산 자락의 마을이다. 좁게는 구림, 크게 보자면 월출산에는 아직도 도인이 산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않고 있는 은둔자다. 그가 하산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필생의 역사(役事)를 위해 현신할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60세를 넘기며 세상을 얻을 인사다.

월출산은 예술이다. 일본의 어느 거물급 수석(壽石) 애호가는 값에 구애받지 않고 이 땅의 오묘한 자연석을 사들이고 있다. 한국 산하의 아름다움과 축경(縮景)의 매력을 앉아서 감상하는 이다. 이런 그가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는 수석이 월출산이다. 산 전체를 최고의 수석으로 치는 것이다. 월출산이 산이라 다행스럽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달은 허공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고 월출산을 묘사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라며 월출산 선경(仙境)을 가리는 안개를 탓했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월출산 구정봉(九井峰)이 창검을 들고 허공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천탑도 움직인다. 어인 일인고. 아니나 다를세라 달이 오르네’라면서 무릎을 쳤다. 불멸의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월출산의 명승을 상상하면 이 병란 중에서도 늘 생각이 난다’며 동중정(動中靜)했다.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든 김창조(金昌祖)에게 월출산은 예술혼이었다.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린 최경창(崔慶昌)은 월출산 태생이 아니랄까봐 시(詩)와 서화(書畵), 피리 연주에 능한 예인이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 덕분에 월출산은 한결 친근해졌다. 하춘화의 ‘영암아리랑’은 ‘월출산 아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풍년이 온다.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흥타령 부네. 목화짐 지고 흥겹게 부네.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