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2.23 22:46
선거운동 내내 끌려다니기 급급… 고유 의제와 정치상품 잃어버려
독자적 정권 탈환 역부족 입증 '자기부정' 했던 英노동당처럼
김대중·노무현 넘는 개혁 필요… 기득권 내려놓을 수 있나가 관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실 역대 진보 후보 중 최다(最多)라는 문재인 후보의 득표수 1469만 표를 모두 민주통합당에 대한 지지로 해석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양자 대결로 선거가 압축된 탓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거부감이 큰 유권자들이 차선책으로 문재인 후보를 선택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 후보 지지자들은 이질적 구성이었고 순수하게 민주통합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수는 더욱 적었던 셈이다. 단일 후보로도 졌지만 냉정하게 보면 민주통합당은 독자적으로는 새누리당에 감히 맞설 정도의 힘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위기는 이미 선거 운동 초반에 나타났다. 전통적인 지지자 중 적지 않은 이가 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유보하고 안철수 전 교수 지지로 돌아섰다. 호남에서도 이런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분명한 경고 신호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각오로 과감한 개혁을 약속하고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려고 하기보다는, 야권 후보 단일화를 통해 유권자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선거 공학적 전략을 취했다. 그 때문에 막판까지 안철수 후보에게 끌려다녀야 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민주통합당은 선거에서 제기된 유권자의 요구에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국내적으로도 주택·노후대책·일자리·교육 등 실생활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불안감이 큰 영향을 미친 선거였지만, 경제 민주화, 복지·민생의 이슈는 새누리당이 선점했고 논쟁을 주도해 나갔다. 이번 선거의 승패를 사실상 좌우한 수도권 유권자의 야권 이탈이나 50대 유권자의 여당 지지 결집은 민주통합당이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선택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더욱 뼈아프게 느껴야 하는 것은 유권자에게 내세울 만한 독자적인 의제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 중요하게 대두했던 의제 가운데 정치 개혁 이슈는 안철수 후보에게 빼앗겼고, 경제·민생 이슈는 박근혜 후보가 차지해 버렸다. 더욱이 민주·자유·인권과 같은 전통적인 진보 의제는 민주화 이후 25년이 흐른 지금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예전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민주통합당은 내세울 만한 고유한 정치적 상품을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과연 5년 뒤에는 민주통합당이 집권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선거 결과가 확정된 후 침울한 모습의 민주통합당을 보며 영국 노동당을 떠올렸다. 영국 노동당은 1979년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장기 파업으로 전 국민이 고통을 겪은 이른바 '불만의 겨울'을 보낸 뒤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 뒤 노동당은 이념적으로 극단으로 기울었고 1983년 총선에서는 전후 최악 성적으로 대패했다. 그 뒤부터 당내 개혁이 본격화되었지만 1987년, 1992년 총선에서 연속으로 패했다. 특히 1992년 총선 패배는 노동당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내 개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보수당 장기 지배에 대한 식상함도 있었고 총선 전의 여론조사에서도 근소하게나마 보수당에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투표장에 선 적지 않은 유권자는 여전히 노동당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수당은 인기가 하락한 대처를 내치고 존 메이저라는 새로운 얼굴을 내세워 다시 승리했다. 노동당이 다시 집권한 것은 토니 블레어가 당권을 잡고 사실상 '자기부정'에 가까운 수준의 철저한 당 혁신을 거두고 난 이후였다. 그러기까지 18년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민주통합당이 유권자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김대중·노무현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자기 개혁이 필요할 것 같다. 민주통합당 내 적지 않은 이가 이런 생각에 동의하겠지만, 말로는 쉽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이룰 수 있는 개혁인 만큼 그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고통을 수반하는 자기 혁신 없이 남의 잘못과 실수에 편승하겠다는 태도로는 한번 잃어버린 정치적 신뢰를 쉽사리 회복할 수 없다. 보수 10년 집권이 '저절로' 정권 교체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 모습으로는 5년 뒤에도 민주통합당의 미래는 어두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