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中 여황제 무측천
이법철기자(truelook@hanmail.net) 2013.03.08 11:07:42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화신하여 온다는 경전의 말씀이 전해온다. 그것은 비유컨대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만월(滿月)이 하나이지만, 일천강(一千江)에 떠 있듯이 관세음보살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화신은 부지기수의 숫자로 인간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나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불교 수행하는 모습, 성불하는 모습,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일체중생이 자신과 같이 자비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화신들의 이야기는 부지기수로 전해오지만,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을 소개한다.
관음기도를 하여 성취한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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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의 어머니 양씨(楊氏)는 사족 출신이었다. 양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절과 시를 익혔으며, 독서에 힘썼다. 특히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절에 가지 않는 날이면, 집안에서 향을 피워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씨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벽에다 써걸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항상 소리내어 읽고 각골명심(刻骨銘心)하듯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9대에 이르기까지 악행을 했다는 세평(世評)을 듣는 일이 없도록 사방에 선행을 베플어야 한다”
양씨는 자신은 결혼하지 않고 죽은 부모를 위해 관세음보살님전에 기도 염불하며 왕생극락을 축원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소문을 들은 당 고조 이연(李淵)은 자신이 아끼고 믿는 무사확을 불러 친히 황제가 혼주가 맡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주었다. 결혼하지 않고 관음기도로 일생을 보내려 했던 양씨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때가 서기 622년 전후로 무사확은 마흔여섯, 양씨는 마흔 네 살로서 부부가 되었다.
당의 고조가 붕어하자 계승한 황제 태종 이세민은 병법의 달인이요, 용병술의 달인인 무사확을 이주도독에 이명하고, 이주, 융주, 시주, 정주, 서주, 용주, 등 6주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어느 날, 무사확의 아내 양씨가 관음보살전에 향피워 기도하는 중에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관음진신이 현신하여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기도가 간절하니 내가 너의 몸을 빌어 태어나 불교를 흥왕 시키고, 중생을 구원하겠노라.” 그 후 양씨는 무측천을 낳았다. 무측천이 강보에 싸여 울다가도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을 불러주면 울음을 그쳤다 한다. 그 후 무측천은 말을 하면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관음보살전에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선인(仙人)이 무측천이 여황제로 등극할 것을 예언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하여 득도한 선인(仙人) ‘아시타’가 왕궁에 찾아와 강보에 싸인 아기 실달태자의 관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왕자는 세상에 머물면 전인도를 통일하여 선정을 베플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출가하면 성중성(聖中聖)으로, 천인(天人)이 존경하는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저는 늙고 병들어 수명이 다되어 왕자님의 성공을 보거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이 죽게 됩니다. 인연이 안되어 그것이 한없이 슬픕니다.”
역시 무측천이 아기로 강보에 싸였을 때, 중국 최고의 선인 “원천강”이 무사확이 이주도둑으로 재직할 때, 집으로 찾아왔다. 원천강은 우선 양씨의 관상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절을 올렸다. “부인께서는 성인의 가피로 귀한 자식을 두셨는데, 중국 역사에 유일한 귀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당시 양씨부인은 무측천을 남자 아이 옷을 입혀 강보에 싼채 원천강에게 보여주었다. 원천강은 “ 이 자제분은 귀한 상을 가져 귀인중에서 존귀한 상입니다. 만약 여자라면 훗날 여황(女皇)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외부에 소문 내서는 절대 안됩니다."
무측천의 아명은 무미랑(武媚娘)이다. 그녀가 여덟 살 되던 631년에 아버지 무사확은 형주 도독으로 전직 임용되었고, 형주, 협주, 풍주, 낭주, 악주, 과주, 송주 등 7개 주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635년 5월 고조인 이연(李淵)이 죽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연이 죽자 무사확은 형주에서 슬퍼하다가 병이 들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당시 무미랑은 겨우 열두살이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양씨와 무미랑은 무사확의 천도를 위해 지극지성으로 “나무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며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무측천은 얼마나 미인이었을까? 이상한 일이다. 역대 제왕은 자신의 진영(眞影)과 소상(塑像)을 후세에 남기기를 좋아 했는데, 무측천은 자신의 진영과 소상을 남기기를 좋아하지 않아 정확한 진영과 소상이 현재 전해오지 않는다. 명나라 때, 역대제후상(歷代帝后像) 등이 전해오나 그것의 대부분은 후세에 상상으로 그린 것일 뿐이다. 무측천의 관상을 본 원천강의 증언에 의하면, “제왕의 귀한 상이고, 용의 눈과 봉황의 목을 하였으며, 복희(伏曦)의 상이라고 말한 것이 전해올 뿐이다.
무측천의 진짜 화상(畵像)은 전무한 것일까? 아니다. 무측천은 자신이 황제가 된 후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서를 받은 화공과 소상(塑像) 조각가에게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것을 강조하며, 비밀리에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관음진영과 관음상(像)을 무수히 조각하게 하여 전국에 봉안하여 민간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하였다. 오늘날 중국전역에 퍼진 대부분 관음보살의 탱화와 관음상의 본 모델은 중국 최초의 여황제이며, 어머니와 함께 소녀시절부터 관음신앙을 하여 계시를 받은 무측천의 얼굴과 몸이었다. 관음의 진신(眞身)은 우주에 변만하여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광음의 화신인 무측천이 자신의 모습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감업사(減業寺)에서 비구니가 된 무미랑
무미랑은 열 네 살 되던 해에 당태종은 그녀가 천하의 절색이요, 박학다식하고, 예절에 밝다는 말을 듣고 즉시 조서를 내려 대궐로 불러 재인(才人)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당태종이 무미랑을 부른 것은 총애하는 여인으로 택한 것이 아닌 이버지의 친구라 할 수 있는 무사확의 딸이었기에 대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특채한 것이다. 당태종은 무미랑의 손한번 잡지 않고 어린 시녀로 생각하고 일을 시켰을 뿐이다.
늙고 병이든 대다수 황제들이 그렇듯이, 당태종도 말년에는 대신들은 물론 황자들도 믿지를 못하고 의심했다. 태종이 병이 깊어졌을 때, 태종이 가장 사랑하는 문덕황후 장손씨가 낳은 셋째 아들 이치(李治)가 병문안을 자주 오고 병수발을 자주 들었다. 이치는 태자가 될 수 없는 위치였지만, 태종의 병수발을 지극지성으로 하여 신임을 얻어 마침내 위 형들을 제치고 태자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치가 병수발을 할 때 여러후궁 가운데 무미랑과 함께 태종의 병수발을 하는 횟수가 잦았다. 이치는 무축천보다 네 살 어렸지만, 병수발을 하면서 무미랑을 짝사랑하게 되었고, 무미랑도 이치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649년 5월 16일, 태종은 종남산에서 도사들의 만수무강 기도를 받았지만, 천명은 피할 수 없어 죽었다. 이틀 후 태자 이치가 태종의 관 앞에서 즉위했는데, 바로 당(唐) 고종이다. 고종은 태종의 비빈들에게 감업사(減業寺)에서 여승이 되도록 명령했다. 부처님전에 태종의 왕생극락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생을 마치라는 뜻이다. 무미랑은 태종과의 손도 잡아보지 못했지만, 비구니가 되는 억울한 처지가 되었다. 고종은 무미랑을 잊지 못하여 감업사에 찾아와 비구니가 된 무미랑을 찾아 부여안고 울었다.
마침내 무미랑은 당 고종의 명을 받들어 4년간의 감업사 비구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번 황궁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고종은 무미랑이 아들 이홍(李弘)을 낳았기에 직위를 소의(昭義)에 봉했다. 소의는 정3품의 벼슬이었고, 이때 무미랑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후 다사다난한 세월을 거쳐 무미랑은 마침내 봉관(鳳冠)을 쓰고 당나라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제행무상
태종과 고종의 옆에서 정치를 배운 것도 중요하지만, 고금의 만권서적을 통독하여 깨닫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무황후는 남편 고종이 병이 깊어 정사를 직접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아닌 정치를 직접 관여하고 결재하기 시작했다. 중국 천하의 정치는 무황후가 좌지우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반란을 잠재우고, 부정부패 척결에 나섰다. 무황후의 정치는 대다수 백성이 환영하는 선정이어서 찬가가 높았다.
683년 12월 4일, 고종이 붕어했다. 그 후 무측천은 태후의 신분으로 무측천의 셋째 아들 현(顯)을 고종의 관앞에서 황제로 즉위하게 만들었는데, 중종(中宗)이라 했다. 그런데 중종은 황후 위씨를 총애하여 황후의 아버지 위현정(韋玄貞)에게 최고위 관직을 제수하려하고, 유모의 아들까지 5품의 고위직을 주려는 등 벼슬을 마구잡이로 선심을 쓰려고 했다. 재상 배염이 불가론을 상주하자 중종은 격노하여 “나는 위현정에게 천하라도 주려고 한다!”고 소리쳤다. 이 보고를 들은 무측천은 중종이 나라를 망 칠수 있다고 느꼈다. 중종을 폐위시키 는 등 몇 차례의 정변을 겪고 나서 마침내 무측천이 나라의 이름을 주(周)로 하여 자신이 주나라의 여황제로 등극하였다. 중국 역사에 최초로 여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무측천은 여황이 된 후로 천하 백성의 고통을 없애고 안락과 풍요를 주기위해 역사에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비의 선정을 베풀었다. 한편 중국 천하의 백성은 물론 이웃 나라에 까지 불교중흥을 위해 진력하였다. 전국 각지에 불상을 조각 봉안하여 중생이 귀의케 하면서 특히 관음신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도처에 관음상을 봉안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향화를 받들게 하고, 기도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대부분 관음상은 앞서 언급했듯이, 무측천의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한 것이다. 자신이 영원히 관음보살의 화신으로써 중생을 구원하고 싶은 소망을 보인 것일까?
704년 무측천의 부귀영화에도 제행무상의 시기가 닥쳤다. 무측천이 병이 위중하여 장생원(長生院)에서 와병 고통속에 신음중일 때, 장간지가 태자와 짜고 역모를 꾸몄다. 역모의 진상은 무측천의 병시중과 약수발을 하는 경호원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역모를 꾸며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내걸고 장간지 등이 군사를 일으켜 먼저 장역지 장종의 목을 치고, 무측천을 별전에 가두었다. 늙고 병든 무측천은 제행무상을 절감하고, 장간지 등이 요청하는 대로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국호를 다시 당(唐)으로 회복시켜주었다.
무측천은 소원을 태자에게 요청했다. 첫째, 당(唐)의 국호를 계승할 것, 둘째, 자신이 죽은 후 남편 고종과 합장(合葬)해줄 것과, 셋째, 자신을 황제로 칭하지 말고, 고종의 아내로서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칭하게 했다. 다섯째, 자신의 얼굴을 남기지 말고, 자신의 비석에는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워 역사에 남기도록 했다.
무측천은 관음의 화신으로 영원히 사는가?
705년 11월 26일 혹한의 겨울 어느 날 저녘 무렵, 무측천은 “나무관세음보살”의 불호를 외우면서 상양궁(궁)의 선거전에서 여든 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다시 복위한 그의 아들 중종 황제가 부복하여 무측천을 추존하여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 로 하고, 거대한 비석에 무측천의 공로에 대한 비문을 새겨 만천하에 알려 역사의 교훈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단호히 거부하고 이렇게 유언했다. “황제의 칭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칭하라. 그러나 나의 비석에는 글 한자도 없는 공(空), 무자비(無字碑)를 세우기 바란다.” 무측천은 왜 無字碑를 고집했을까? 생전의 깨달음과 공덕이 크지 않은 일부 고승도 과장되게 중생을 기만하기조차 하는 대형비석에 현란스럽고 신비주의로 비문을 적어 후세에 전하는데, 무측천은 왜 無字碑로 만족했을까? 왜 자신의 진영(眞影)은 남기지 않고, 관음보살상으로 영원히 남으려 했을까? 화두삼아 참구 해볼만 하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국 관음상은 거의 무측천의 진용(眞容)이라는 것을 천하에 밝히는 바이다. 그 관음상은 한국불교계에서도 신앙의 대상이 된지 오래인지 모른다.
나는 단언컨대, 중국의 여황제 무측천만 관세음보살의 화신일 것인가? 대한민국 이땅에도 관음보살의 자비를 실천하는 화신 보살은 부지기수이다. 그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일생을 노래와 찬불가를 부르면서 중생을 관음신앙으로 인도하는 불자가수 송춘희보살도 월인천강수(月印千江水)하듯,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나는 믿는다. bubchul@hotmail.com/www.jabg.net
*필자/이법철. 스님. 시인. 불교신문 전 주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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