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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일보 가명(假名) 칼럼의 파워

화이트보스 2013. 4. 30. 15:29

인민일보 가명(假名) 칼럼의 파워

  • 지해범 논설위원
  • 입력 : 2013.04.29 23:09

    '한반도 위기 북한 책임' 인민일보 가명 칼럼
    中 지도부 의중 담긴 대북 경고로 봐야 해…
    가명 기고는 文革 유산외교 마찰 줄이면서
    당이 발언하는 수단대북 인식 변화 주목돼

    
	지해범 논설위원 사진
    지해범 논설위원

    중국 인민일보는 이달 초 해외판 1면 칼럼에서 "북한은 형세를 오판 말라"며 비판한 적이 있다. '국제 문제 전문가' 화이원(華益文)이란 필자는 글에서 "작년 이후 한반도 긴장이 고조된 것에 대해 북한은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고 질타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북한에 대해 '책임'까지 거론하며 성토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글의 진의가 궁금해 필자인 '화이원'과 통화해보기로 했다.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화이원'을 치자 칼럼 목록만 나올 뿐, 출생지나 학력, 경력, 얼굴 사진 등은 찾을 수 없었다. 서울과 베이징의 친구들에게 그의 연락처를 부탁했다. 처음엔 "모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알려고 해도 모를 거다. 최고위층만 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복수의 인민일보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화이원'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인물로 밝혀졌다. 즉 누군가가 이 글을 쓰고 '화이원'이란 가명(假名)을 사용한 것이다.

    인민일보는 왜 '가명' 필자를 내세워 북한을 비판했을까? 중국 현대사에서 '가명' 기고는 정치 투쟁기에 만연했다. 1966년 4인방의 우두머리 장칭(江靑)은 '가오쥐(高炬·높이 든 횃불)'란 가명으로 해방군보에 '반당 반사회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공격'이란 글을 실어 우파에 대한 공격 나팔을 울렸다. 문혁 시기 사회 집단은 글쓰기 팀을 조직해 가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북경대와 청화대 두 대학(兩校·발음이 량샤오)은 연합해서 '량샤오(梁效)'란 글쓰기 팀을 조직해 '비림비공(批林批孔·임표와 공자를 비판함)운동'을 펼쳤다. 중앙당교 역시 '당교의 글(黨校文)'과 비슷한 발음의 '탕샤오원(唐曉文)'이란 이름으로 선전전을 전개했다. 중국에서 가명 기고는 정적(政敵)에게 타격을 주면서 자신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가명 칼럼의 주제는 국제 문제로 옮겨갔다. 정부가 직접 나서기 곤란한 국제 문제에 대해 관영 언론이 나서 입장을 밝히거나 상대국 주장을 반박했다. 인민일보에 '중성(鐘聲)' '런중핑(任仲平)' 같은 가명 필자들이 등장했다. '종소리'를 뜻하는 '중성'은 2008년 이후 인민일보 국제 평론을 담당하는 필자들의 집단 필명이다. 중대한 사안이 있을 경우 가끔 공산당이나 외교부, 연구기관의 전문가들도 가명으로 글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런중핑'은 '인민일보의 중요한 평론'의 앞글자 '인중평'만 따서 동음이의의 한자(任仲平)로 바꿔치기한 이름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인민일보가 국제 논평을 실을 때 사안에 따라 신문사 내부와 외교부, 당 지도부 등 3단계 심사를 거치는 것으로 안다"며 "메시지는 전하되 상대국과 외교 마찰은 줄이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화이원'은 신문 기자일 수도, 정부 인사일 수도 있다. 그가 누구든 인민일보의 가명 논평은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의 뜻이 반영된 '대북(對北)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정권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전쟁 위협에 실망하고 분노한 중국 지도부가 북측에 '도발을 멈추지 않으면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국의 달라진 대북 인식은 동북아 전략과 한반도 정책의 조정, 북한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는 '전략적 기회의 시기'가 온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의 정책 조정을 기다리기보다 실천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평화발전 방안을 먼저 제시해 중국과 공감대를 넓힐 필요가 있다. 중국은 미국과 '새로운 대국 관계'를 모색 중이며 미국도 이에 긍정적이다. 한·미·중(韓美中)이 '한반도 솔루션'을 만들어내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외교에도 '창조'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