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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당하고 좌절했던 50代 여성, 臟器·피부·뼈 모두 기증하고 숨져…]

화이트보스 2013. 5. 7. 16:58

사기당하고 좌절했던 50代 여성, 臟器·피부·뼈 모두 기증하고 숨져…]
혼자 살다 腦死한 강재원씨, 장기 기증 정부 지원금도 기부
매달 후원금 내며 보육원 봉사… 死後 통장 정리해보니 잔고 0원

지난 5일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강재원(여·52)씨 빈소에는 상주(喪主)가 4명이었다. 여고 동창 손종숙(50), 김선희(51), 연문선(50)씨와 숨진 강씨가 친동생처럼 아꼈던 강신자(47)씨가 검은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았다. 강신자씨는 "우리 아이들이 '이모, 이모' 하면서 재원이 언니를 잘 따랐다"며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상주로 빈소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 '써니'처럼 친구의 상주가 된 여고 동창들은 옛일을 회상했다.

"아저씨, 리어카 좀 빌려주세요. 내 친구 이사하니까." 1978년 가을이었다. 강원도 춘천여고 1학년 10반 학생 8명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학교 수위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자취방을 옮기는 친구를 돕기 위해서였다. 여고생들은 굽이굽이 오르막길로 리어카를 밀어올렸다. 이렇게 도착한 연탄보일러가 딸린 9.9㎡(약 3평) 단칸방은 깔깔대는 웃음소리로 넘쳤다. 강재원씨 자취방은 이날부터 친구들 '아지트'가 됐다. 시시때때로 모여 수다를 떨고 함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 강재원씨 춘천여고 동창들이 강씨의 영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강신자, 연문선, 손종숙, 김선희, 한명희씨. 한씨는 늦게 연락을 받아 상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장례기간 내내 함께했다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 강재원씨 춘천여고 동창들이 강씨의 영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강신자, 연문선, 손종숙, 김선희, 한명희씨. 한씨는 늦게 연락을 받아 상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장례기간 내내 함께했다. /김지호 객원기자
강씨는 혼자 학교에 다녔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한 후부터다. 강원도 홍천에서 춘천으로 유학 간 그는 친구들에게 정을 붙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각자 다른 반으로 흩어졌는데도 선생님들이 "네 친구 저기 있다"고 알려줄 정도였다. 그는 외로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은 "순정만화 주인공인 '캔디' 같다"고 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꿋꿋하게 견뎌내는 모습을 빗댄 것이다. 친구들은 "학창 시절 친구들이 졸고 있으면 선생님이 '1번(강재원)이 나와서 캔디 노래 좀 불러봐'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강씨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옷을 팔았다. 법대에 진학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밤에는 법전(法典)을 뒤적였다. 그는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돕는 데 사랑을 쏟았다.

건강했던 강씨는 지난달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위독한 상태로 발견됐다. 지난 4일 최종적으로 뇌사(腦死) 판정을 받았다. 강씨의 고향 선배는 "10여년 전 의류 공장 인수와 관련해 수억원대 사기를 당한 것으로 안다"며 "이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등 이런저런 원인이 겹쳐 나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1981년 3월 춘천여고 졸업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주현, 손종숙, 연문선, 한명희, 김선희, 최영
1981년 3월 춘천여고 졸업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주현, 손종숙, 연문선, 한명희, 김선희, 최영 옥, 고(故) 강재원씨. /연문선씨 제공

친구들은 평소 "장기 기증을 꼭 하고 싶다"는 강씨의 뜻을 받들어 간장과 신장, 각막, 뼈와 피부 조직을 아픈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유가족의 동의를 받는 것. 친구 손씨는 연락이 닿지 않던 강씨의 먼 친척 집을 무작정 찾아가 설득했다. 지난 4일 적출(摘出)된 강씨의 장기는 20대부터 60대까지 5명이 이식을 받을 예정이다. 피부와 뼈는 150여명 이상 환자에게 돌아간다고 병원 관계자는 전했다. 친구들은 장기 기증에 대한 정부 지원금 940만원 전액을 강씨의 이름으로 서울성모병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친구들은 숨진 강씨의 통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잔고액이 0원인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강씨의 통장에서 홍천보육원이나 굿네이버스 같은 NGO 단체로 매달 꼬박꼬박 돈이 빠져나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강씨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한 달에 200만~300만원을 후원금으로 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도 끊기는 법이 없었다. 주말에는 홍천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씻겨주고, 빨래를 했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나중에 무료 양로원을 짓고, 불쌍한 어르신들을 돌보며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강씨는 마지막 순간 친구 한 명 한 명 앞으로 "너를 위해 기도할게" "나를 100% 믿어주고 언제나 도움이 되고자 애쓴 내 친구, 끝까지 날 믿어줘 정말 고맙다"고 적었다.

6일 오전 강씨 장례미사 때 친구 6명이 관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쳤다. 상주 연씨가 고인의 영정을 안고 먼저 나섰고 위패는 또 다른 상주인 손씨가 들었다. 서울추모공원에서 강씨는 화장(火葬)됐다. 손씨는 "어떻게든 잘 받아들이고, 가슴에 담아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나도 친구처럼 나중에는 장기 기증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씨는 "내 친구는 세상에 상처를 입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난다"며 "재원이라는 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내게는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영화 써니는

2011년 개봉한 영화 '써니'는 관객 737만명, 국내 흥행 기록 10위에 오른 화제작. 성공한 미혼의 사업가 하춘화(진희경)는 시한부 진단을 받게 되자 여고 단짝 친구 6명을 찾아낸다. 숨진 하춘하의 빈소에 모인 친구들이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는 하춘화의 유언을 듣는 장면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