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5.09 10:49 | 수정 : 2013.05.09 10:50
8일 방송된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출연한 우종창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은 “김정일이 2001년 2월15일 자신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집무실에서 최측근 경호원으로부터 암살을 당할 뻔 했다”고 주장했다.
우 전 편집위원에 따르면 훗날 성(性)이 박씨로만 알려진 김정일의 경호원은 이날 김정일 공관의 집무실에서 김정일을 향해 권총 6발을 발사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 안에 들어있던 6발의 탄환을 모두 쏜 것이다.
그중 5발은 김정은 옆에 있던 당간부가 자신의 몸을 던져 모두 받아냈고, 나머지 1발이 김정은의 옆구리에 맞았다는 것이 우 전 편집위원의 주장이다.
그 근거로 우 전 편집위원은 “2월15일부터 3월22일까지 37일간 김정일의 행적이 북한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방송 등 모든 매체에서 일시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 기간 김정일이 총상을 치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관련 사실을 전해들었다는 우 전 편집위원은 “미 정보기관에서는 김정일이 총을 맞았을 당시 현장에 군수담당 고관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실제 북한 노동신문의 2월21일자 부고란에는 군수공업부 1부부장이었던 박송봉(당시 67세)이 급병으로 죽었다는 부고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우 전 편집위원은 “노동신문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고 전했다. 박송봉이 김정일 대신 5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1997년 고 황장엽씨와 함께 베이징에서 한국으로 망명을 했던 김덕홍시 역시 확인해 준 사실이라고 한다.
이례적으로 김정일이 자취를 감췄던 37일간 이상 상황은 북한 곳곳에서 벌어졌다. 2001년 3월10일 김대중 정부의 김한길 문화부 장관은 당시 북한 권력 3위였던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다. 문화관광체육분야의 교류를 위해서다.
하지만 김한길 당시 장관이 북한을 방문했던 3월13일까지 4일동안 김 전 장관은 자신을 초청했던 김용순을 단 한차례도 못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 전 편집위원은 “김 전 장관이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김용순이 전화를 걸어 ‘불가피한 일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최측근으로서 당시 권력 3위였던 김용순에게 불가피한 일은 김정일의 신변 이상이었다는 주장이다.
3월15일에는 숨진 한덕수 조총련 의장이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히는 날이었는데 북한과 조총련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면 이날 김정일이 불참한 것도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2월15일 김정일 자신의 생일 전날에는 당일꾼이 모두 모여 보고대회를 여는데, 북한 민족 최대 행사인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열린 보고대회에서도 김정일은 전에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병상에 누워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정일을 37일만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불러낸 인물은 장관급인 쩡칭홍 중국 조직부장이었다. 쩡칭홍 부장은 3월20일 평양에 도착했고 관례대로라면 김정일은 당일 그를 영접하는 게 맞았지만 이틀이 지난 22일에야 면담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 편집위원은 “당시 37일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의 사진을 그 전과 비교해본 결과 우리 정보당국과 사진 분석 전문가들은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사실 북한 내부에서 반(反) 김씨 왕조 세력들이 주도했던 암살 시도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상당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서도 1990년대 북한에서 3차례 군부 쿠데타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으로 망명해 피살됐던 김정일의 처조카 역시 생전에 김정일이 잘 때마다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잤고,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의 부인 고영희가 밤마다 머리 맡의 김정일 권총을 치우고 자는 게 일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우 전 편집위원은 “황장엽의 아들 황경모가 김일성 대학 동기들과 김정일 암살 시도를 하다 실패했다는 북한 보도도 나온 적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