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반공 포로 석방에 숨어있던 역사 | ◈‥  냉전과평화

화이트보스 2013. 6. 22. 17:44

반공 포로 석방에 숨어있던 역사 | ◈‥  냉전과평화
장막을헤치고 | 조회 94 |추천 0 | 2012.09.03. 22:22

 

휴전 협상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난제가 포로 송환이었다. 원론적으로 보면 양측이 잡고 있던 포로를 그냥 맞교환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라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19511218일 처음 포로 명부를 교환하였을 때 유엔군 측은 경악하였다. 양측이 추산하고 있는 포로 숫자가 실제로 공개된 명단과 차이가 있었고 특히 공산군 측 주장은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 포로 교환은 휴전 협상의 난제였다 ]


공산군 측의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유엔군 측이 추산하고 있던 인원은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총 10만 여명이었으나 공산군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명부에는 불과 11,559명밖에 없었다.

당시에 유엔군은 그 열배가 넘는 총 132,474명의 명부를 공산군 측에게 넘긴 상태여서 1:1 교환이 불가능하였다. 공산군 측은 포로가 된 국군들이 전향하여 북한군에 재 입대하였으므로 포로가 아니라는 어불성설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마디로 자신들 임의대로 포로를 처리하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었다. 현재도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을 통해서 귀순하는 생존 국군 포로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국군 포로 송환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의 장기화로 말미암아 국내에서 휴전에 관한 압력이 높았던 미국은 포로 문제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포로들에게 자신의 행로를 결정할 자유가 주어졌다 ]


결국 줄다리기 끝에 1953525, 유엔군 측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위원회에서 심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수정안을 제시하여 공산군 측의 동의를 얻어내었고, 그 결과 양측은 195368일 포로 송환 협정 최종 안에 서명했다.

타결된 협정에 따르면 포로들은 자유의사에 의거해서 북과 남, 혹은 제3국으로 갈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러한 협상 내용에 격렬히 반발했다. 우선 타결에만 급급하여 국군 포로들의 송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최종적으로 귀환이 확정 된 국군 포로가 불과 8,343명에 불과했던 반면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진행하더라도 약 10만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북으로 돌아 갈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군사적으로 놓고 보아도 엄청나게 밑지는 장사였다.

 

                     [ 10만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송환될 것이 확실하였다.(북으로 송환되는 북한군 포로) ]


하지만 한국 정부가 휴전을 반대하였던 진짜 이유는 휴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전략적 우위도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분단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도움이 없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다음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고 전쟁이 종결된다는 것은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 문제의 타결은 바로 이런 불안한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전쟁이 재개된다면 유엔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중공은 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고 거대한 배후인 소련도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휴전 후 철군이 확실시 되는 유엔군이 한반도를 떠나면 다시 참전할 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1949,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철군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참담한 전쟁을 겪은 우리 정부의 우려는 당연히 컸다.

 

                [ 휴전 반대는 명분보다 차후 안보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휴전 반대 데모를 벌이던 여학생들) ]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휴전 이후의 안전 보장에 대해 줄기차게 요구하던 상태였는데 미국의 반응이 미지근 하자, 차라리 소규모의 교전이라도 계속 벌여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최악의 경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 우리의 협조 없이는 순순히 이행 될 수 없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전한 미래를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벌여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66, 헌병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 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원용덕은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과 협의를 거쳐 포로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육군 헌병대가 기습적으로 반공 포로를 일거에 석방한 후 이들을 약속된 인근 민가로 도주시켜 보호 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반공 포로임을 입증하려 문신을 새긴 모습 ]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밀사가 파견되었고 61800시를 기해서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었다.

명령에 따라 수용소를 경비하는 헌병대는 미군들을 따돌리고 27,000 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 성공하고 그날 06시에 중앙방송을 통해 `반공 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불안한 휴전을 반대하던 국민들은 우리의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고 환호하였다.

반면 원하는 방향대로 포로송환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예상하던 북한과 중국은 경악하였다.

최소한 10만이상의 병력을 새롭게 보충하고 이를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던 그들은 이 상태로 말미암아 포로 송환이 계획대로 이루어질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놀랐던 것은 예상대로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던 미국이었다.



                                                 [ 석방된 포로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


지난 2년간 줄다리기를 끝에 휴전협정에 사인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순식간 일이 틀어질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급변 된 사태는 결국 한국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미국, 중공 모두가 휴전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보니 회담자체를 깨려 하지 않았고 미국은 어떻게 튈지 모르는 한국을 달래려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