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韓非)와 이사(李斯)의 악연
글 선형길
해질 녘 마을 어귀로 들어서다가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대체 누구기에 이런 향기를!’ 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길목 언덕배기에 아카시아 꽃 한 무더기와 곧 썩어 나자빠질 것 같은 고목 등걸에 매어달린 볼품없는 밤꽃 몇 줄기가 오순도순 모여서 채신머리없이 저녁 바람에 건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색다른 꽃향기의 적절한 어우러짐이 내 분별력을 흔들어 놓은 탓이겠지만 순간이나마 스치고 간 웬 미인의 잔영에 혼자서 실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소로운 얘기를 처음부터 끄집어 낼 건 또 뭔가? 하며 미리부터 고개를 내저을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 언급할 이야기는 누구든 회피하고픈 볼썽사나운 인간 군상들의 진면목을 일부나마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에 얽힌 이야기는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허구 많은 잡다한 얘깃거리 중에서도 퍽이나 무겁고 누구든 다루길 주저하는 소재가 틀림없기에 내 성격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향응을 제공받은 것으로 생각해도 좋겠습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년) 말기, 전국7웅 가운데 하나인 한(韓)나라 왕족의 후예로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BC 280?∼BC 233)는 젊은 시절에 이사(李斯)와 더불어 순경(荀卿)선생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이사는 진시황제의 모사로서 종래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폐하고 군현제도(郡縣制度)를 확립하였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케 한 수완가였습니다. 진나라 영정(진 31대 왕)이 진시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재상에 오른 그도 총명과 재능에 있어서는 한비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자인하였으니 한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한때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세치 혀로 합종책(合從策)과 연횡책(連橫策)을 성사시켜 천하를 진동케 하였지만 한비는 말더듬이라 붓을 즐겨 사용하게 된 탓에 천고에 길이 남을 이채로운 그의 글들을 현세에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단점 덕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는 형명법술(刑名法術) 학(學)을 좋아했으며 이사와 더불어 순경(荀卿:순자)을 섬겼다.”라고 하였는데, 한비가 고대의 형법학(刑法學)을 집대성하고 완성하게 된 데에는 그보다 백여 년 전에 활동했던 한(韓)나라 재상이었던 신불해(申不害, ?~BC 337?)의 술(術)과 진(秦)나라의 재상이었던 상앙(商?, ?~BC 338, 공손앙을 말함)의 변법(變法)에 영향 받은바 큽니다. 하지만 한비가 고대 형법학을 완성하고 가혹한 통치를 실현하려 한 데에는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비는 팔경편(八經篇)에서 “무릇 천하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 근거를 둬야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으니 상벌을 사용할 수가 있다. 상과 벌을 사용할 수 있으니 금령을 세울 수가 있고 금령을 세울 수가 있다면 다스리는 방법은 갖추어진다.”라고 하였는데, 한비의 이 호리오해설(好利惡害設)은 그가 주장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철학적 근거로서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합니다.
순경선생이라 불리는 순자는 한비와 이사의 스승이었고 유학자들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로서 인간의 근본 성품을 논함에 있어서 자사와 맹자 등의 성선설과 맞서 성악설을 주장하여 예(禮)와 의(義)로서 민심을 바로 잡을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비록 순자가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혹은 德治政治)를 아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보고 왕도정치의 차선책으로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내세웠을 뿐더러 그 당위성까지 역설하게 되는데, 한비의 그런 편협한 기개는 강퍅하고 자고심이 강한 스승, 순자에게서 영향을 받은바가 컸을 것입니다.
한나라 왕족의 후예였던 한비는 백척간두에 처한 한(韓)나라와 운명을 함께해야할 처지였기에 한왕(韓王)에게 여러 차례 치국(治國)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질 않게 되자 울분을 담아 글을 쓰게 되는데, 바로 한비자(韓非子)에 수록되어 있는 <고분(孤憤)> <오두(五?)> <저설(儲設)>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비의 <고분(孤憤)> <오두(五?)>을 접한 진의 영정(훗날 진시황제)은 크게 감탄하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고 함께 동문수학한 이사가 그 글의 저자가 한비임을 알려줍니다.
그후 영정은 이사를 파견해 한나라를 정벌케 하는데, 천하통일의 패업을 달성하기 위해 정벌에 나섰을 테지만 진의 영정은 위급에 처한 한왕(韓王)이 화친을 위해 한비를 자신에게 사신으로 파견해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한왕으로선 국운이 걸린 일이라 당시 전국시대 7웅 중에 최강국인 진나라 영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한비만큼 적절한 인물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한비는 진나라로 가서 존한편(存韓篇:한비자 제1권에 수록되어 있음)이란 글을 영정에게 올리는데,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진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위급에 처한 한나라를 구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한비의 계책을 간파한 이사는 진왕 영정에게 ‘한비는 한(韓)나라 왕족의 후예이므로 그를 등용해도 진정으로 진(秦)을 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등용을 않고 오래 잡아두었다가 돌려보내면 후환이 될 것이니 가혹한 법을 적용하여 주살해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부추깁니다.
결국 진왕은 한비를 옥에 가두었고 위기에 처한 그는 자신의 사정을 진왕에게 호소하고자 했지만 끝내 기회를 얻지를 못하고 이사가 보낸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맙니다. 진왕은 한비를 투옥시킨 것을 나중에야 후회하고 풀어주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한비가 죽던 때가 BC 230년경이었는데, 구국을 위한 그의 충정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나라는 진나라에 병합을 자청하였고 그 다음해 한왕 안(安)은 진나라에 인질이 되었으며 한비가 죽은 지 3년 만에 한(韓)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인물 및 용어해설#
한비자(韓非子: 韓非:BC 280?∼BC 233): 55편 20책 십여만 언(言)에 이르는 한비의 대저(大著)로, 본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란 인물도 그리 불리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한비자는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 내용은 거의가 법 지상(法至上)을 강조하고 있으며 한비의 자저(自著)로 알려진 <오두(五?)> <현학(顯學)> <고분(孤憤)> 등의 논지는 인간의 성질은 대체로 타산적이고 악에 기울기 쉬워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무력(無力)한 것이므로 정치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고 세상은 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발전하므로 시세(時世)에 맞는 법을 펴고 상벌을 엄격하게 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유가(儒家)나 묵가(墨家)는 인간사회의 좋은 면만을 보고 우연에만 의존하니 공론(空論)에 불과하므로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 심지어 학자,민중에게 좌우되어선 안 된다고 하였다.
이사(李斯): BC 221년, 진왕 정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이사는 모든 권력을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하고 지방을 36개의 군(郡)으로 재편하고 그 아래 현(縣)을 두는 이른 바 군현제를 실현하고 황제가 직접 지방 관리를 파견케 하였다. 또한 법령을 고치고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했으며 치리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상앙이 국가의식에 도입한 시서예악을 없애고 사상의 통일을 획책하여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소진(蘇秦):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사람. 장의(張儀)와 함께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강성한 진(秦)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던 때였으므로 연(燕)나라의 문후(文侯)에게 6국 합종(合縱)에 따른 이해득실로 설득하였고 다시 조(趙)·한(韓)·위(魏)·제(齊)·초(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시키는 데도 성공하여 BC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南北線上)의 6국 합종에 성공하고 단독으로 6국의 재상이 되었다.
진나라는 소진의 합종책 때문에 십여 년 간 동방 진출을 저지당했으나 진나라의 모사인 장의 등의 연횡책(連衡策)이 성공하자 합종책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 후 소진은 제나라에서 출사했으나, 제나라 대부(大夫)의 미움을 받아 암살당했다. 일개 서생 출신으로 지모변설(智謀辯舌)로써 공명부귀를 얻었고 천하에 이름을 떨쳤기에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連衡策)을 썼던 장의와 더불어 전국시대 책사(策士)의 제1인자로 병칭(竝稱)되고 있다. 그의 아우인 소대(蘇代),소여(蘇?)도 유세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장의(張儀): 합종책(合從策)을 이룬 소진(蘇秦)과 더불어 귀곡자(鬼谷子)에게 사사하였다.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혜문왕(惠文王) 때 진의 재상이 되었고 연횡책(連衡策)을 주창하여 위(魏)·조(趙)·한(韓)나라 등 동서[橫]를 잇는 6국을 설득, 진(秦)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성립시키고 소진의 합종책을 무너뜨리고 진나라의 패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불해(申不害, ?~BC 337?) 중국 전국시대의 한(韓)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로서 허난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 출생으로 한나라의 소후(昭侯)를 섬겨 재상(宰相)이 되었고 15년간 나라를 태평케 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자(申子: 신불해를 높여 부른 말)의 학문은 황로(黃老: 黃帝와 老子,즉 도교를 지칭함)에 근거를 두고 형명(刑名:형벌의 종류와 명칭)에 밝았다"고 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신자 6편>이 전하고 있다고 했으나, 송(宋)나라 때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군서치요(群書治要)> <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 있던 일문(逸文)을 모아놓은 책이 전해지고 있다.
상앙(商?): 위앙(衛?) 또는 공손앙(公孫?)이라고도 불리며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진 효공에게 채용되어 BC 359년 진(秦)나라 변법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형법(刑法)과 토지법 외에도 일종의 연좌제법인, 열 혹은 다섯 가구를 한조로 묶는 십오법(什伍法)과 노예제 폐지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 제국(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다졌다. 진(秦)나라가 부강해지자 위(魏)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陜西省 商縣)지역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리었다.
그의 변법은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일개 서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할 나라로 진을 택했고 진나라 효공을 도와서 소국에 불과했던 진을 전국시대 6국에 필적할만한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나 그로 인해 많은 원한을 샀다. BC 338년 진 효공이 죽고 아들인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자 즉위 전, 법을 어겨 상앙에게 처벌을 받았기에 상앙은 그에 따른 보복을 당해 반역죄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70~403년): 춘추란 말은 공자가 엮은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에서 유래하였고,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동주시대)한 이후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위(魏)·조(趙) 세 성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한 때까지이다(BC 403년).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년): 전국이란 말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고, 세 성씨가 제후로 독립한 후부터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해인, BC 221년까지를 말한다.
봉건제도(封建制度): 혈연적 관계를 기반으로 했던 주(周)나라의 통치조직. 원래 봉건제도란 말은 중국 고대사에서 군현제도에 대응되는 것으로 학문상 통일된 개념이 없어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법제사적으로는 봉주(封主)와 봉신(封臣) 간의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어 봉토수수(封土收受)가 뒤 따른다. 사회적 유형으로는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계서제(階序制)를 이루고 신분제의 견지, 권위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는 동서양이 비슷한 일면이 있다.
군현제도(郡縣制度): 중국 및 신라·고려·조선시대에 실시한 지방 행정제도로써 BC 350년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상앙(商?)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에 41개의 현을 설치하였으나 위에서 언급한 이사는 지방을 36개 군으로 재편하고 황제가 직접 지방관을 파견케 하였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진(秦)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해 버린 사건이다.
형명법술(刑名法術): 형명이란 형벌의 종류와 명칭을 논하는 일종의 학문(學文)이다. 한비에 의하면 “법이란 문서로 편찬하여 관청에 비치하고 일반 백성에게 공포, 시행하는 것이요, 술이란 임금이 마음속에 간직하여 여러 사건을 비교, 대조하여 은밀히 신하들을 통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드러나는 것이 좋으나 술은 은밀하여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왕도정치(王道政治):공맹학(孔孟學)의 중심사상으로 맹자는 공자의 인(仁)사상을 바탕으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기본으로 삼았고 한(漢)제국 이후 중국과 유교 문화권에서 왕도정치가 국가통치의 으뜸 사상이 되었다. 덕치사상(德治思想)은 맹자의 왕도론(王道論)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는데, 맹자는 인간본성(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덕치를 주장하였고 사욕에 의한 강권지배를 배격하였다. 덕치(德治)는 치리자(治理者)를 비롯하여 사람의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므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전국시대 말기, 군권강화(君權强化)를 옹호하는 순자(荀子)의 성악설과 대치가 되고 덕치(德治)와 패권(覇權)이 상치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덕치주의(德治主義)와 패권주의(覇權主義)는 오랫동안 동양 정치사상에서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다.
#참고문헌#
<사기열전>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도덕경>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고문진보> <채근담> <이야기중국사> <두산백과> <네이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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