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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炳賢 당시 합참의장, “광주사태 때 韓美공조로 北의 개입을 원천 봉쇄했다”“북한, 1개 대대 침투시킬 해상수송능력 없어… 완전 거짓말”李知映(

화이트보스 2013. 7. 17. 17:25

柳炳賢 당시 합참의장, “광주사태 때 韓美공조로 北의 개입을 원천 봉쇄했다”
“북한, 1개 대대 침투시킬 해상수송능력 없어… 완전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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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5·18 무렵, 종편 채널에서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했다. 1980년 광주에 1개 대대 600명 규모의 북한군이 급파됐다는 것이다. ‘직접 광주에 왔었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射殺(사살)했다’는 자칭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의 탈북자까지 등장했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한반도가 가장 긴장된 시기였던 당시 안보상황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 뒤 국방부는 ‘북한군 광주투입설’을 공식 부인했고, 종편 방송들도 탈북자들의 증언을 검증,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아직도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광주사태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한국 방어을 책임지고 있었던 柳炳賢(유병현) 전 駐美(주미)대사를 만나, 이런 주장들을 물어보았다. 유 대사는 7년 간 對(대)간첩대책본부장을 역임해 휴전 이후 계속된 무장공비들의 침투를 저지했고,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을 상대해 그들의 습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그는 韓美(한미)동맹의 핵심인 한미연합사 창설의 한국 측 主役(주역)이기도 하다.

“서해는 우리 해군이, 동해는 美7함대가 감시”

먼저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합참의장으로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물었다.

“우리나라는 그때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 체제가 계속되면서 정치적으로 몹시 취약했었다. 북한은 국내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래라 저래라’하지는 못하고, 단지 국방장관실에서 각군 총장과 매일 회합을 가졌다.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를 책임지고 조치하고, 나는 광주사태가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盡力(진력)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의 무장공비들은 과거 주로 변산반도에 상륙해 광주, 지리산 지역으로 침투했다. 따라서 해군참모총장에게 각별히 부탁해 해군의 可用(가용)한 戰力(전력)을 변산반도 쪽으로 돌려 이북의 특전부대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한국에서 (안보상)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반드시 미국과 협조해야 한다. 광주사태 초기에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만나 일본에 있는 美7함대, 항공모함戰隊(전대)를 한국 水域(수역)에 파견하도록 조치했다. 북한에 ‘절대 광주사태를 악용하려 하지 마라.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경우 韓美연합군은 철저한 대처를 하겠다’는 경고를 주려는 의미였다. 마찬가지로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을 이용해 매일 美7함대의 동태를 보도하도록 했다. 북한에 정보가 들어가도록 ‘쓰고 싶은 대로 써라’며 보도통제도 하지 않았다.

또 하나, 美국무성으로 하여금 ‘북한은 광주사태에 절대 편승하지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발표하도록 했다. 당시 우리 외무부는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거의 군사정권이었고 당시 외무부에는 안보 분야의 조직이 되어있지 않아서 어떻게 할 도리를 몰랐다. 결국 국방부에서 내가 중심이 되어 조치를 취했다. 후에 최규하 대통령이 당시 외무부 장관을 불러 ‘당신 봉급의 반은 유 장군한테 드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국내외 언론 이용, 북한에 경고”

柳대사의 증언처럼 1980년 5월23일부터 6월2일까지 우리 언론에도 美항모의 동향이 지속적으로 보도됐다.

-美조기경보기 2대 한국지역으로 급파 (1980.5.23/동아일보)
-美E3A 2대 오키나와 도착 (1980.5.24/동아일보)
-美국방성 관리, “美항모 미드웨이 등 필요하면 한국 급파” (1980.5.24/동아일보)
-美항모 코럴시號 한국해역으로 내달 중순까지 주둔명령 (1980.5.26/동아일보)
-美국방성, “美항모 코럴시號 한국해역에 도착” (1980.5.28/동아일보)
-[사진] 한국해역을 순항하는 코럴시號 (1980.6.2/동아일보)

당시 美국무성은 광주사태가 절정이던 5월22일(현지 시각)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는 내용의 對北(대북)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柳대사는 “한국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북한이 사태를 악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광주사태 때는 우리와 미국이 이렇게 먼저 그들의 행동을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북한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망설이다가 適期(적기)를 놓쳤다”고 말했다.

“북한, 1개 대대 침투시킬 수송능력 없어… 완전 거짓말”

그는 “(광주사태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서해안을 통해 광주에 침투했다”는 탈북자 임천용 씨의 주장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600명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선박이 필요하다. 북한은 당시 600명 정도의 병력 수송을 할 수 있는, 상비된 선박부대가 없었다. 무장공비를 침투시키기 위한 고속정들은 있었다. 70~80t 정도의 배인데, 20여 명이 정원이다. 600명을 태우려면 몇 대가 필요한가? 이북은 造船(조선) 기술 수준이 낮다. 외국의 구식 배를 헐값에 사와 사용한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600명을 보낸다? 그럴 만한 수송능력이 없다.”

對간첩대책본부장으로서 다년간 무장공비들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말도 전했다.

“광주사태는 예측 가능했던 사건이 아닌 돌발사건이었다. 이런 돌발사건에서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600명이라는 부대를 편성하고 교육해 출동명령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런 작전을 할 때는 사전에 현지에 정찰조를 미리 보내게 되어 있다. 인도하는 병력이 있어야 본대가 들어갈 수 있다. 덮어놓고 600명이 ‘나가자!’해서 광주까지 내려갈 수는 없다. 또 북한이 특전부대를 내려 보낼 때는 우리 국군으로 위장을 시킨다. 잡혔을 때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M1, 칼빈 소총, 우리 군복을 마련해 입혀 내려 보낸다. 600명분을 급히 마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1·21사태와 울진삼척사태 등 북한이 실패한 예와 비교해보기를 권했다. 북한은 1·21사태 때 31명을 보내기 위해 수개월간 준비했다. 청와대 모형을 만들어 공격예행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나머지는 사살됐다. 두명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울진삼척사태 때는 120명을 보냈다. 태백산 지역에 올라가 인민해방촌을 만들겠다고 했다. 120명 대부분이 사살됐다. 시체들을 증거로 제시하면 우리 장비, 우리 피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남한 내 애국청년들이 궐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군은 1964년부터 1976년까지 12년 사이에 약 700명의 무장간첩을 사살했거나 생포했다.

유 대사는 “모든 무장간첩들의 시도가 실패했는데, 광주만 성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고 되물었다. 또 600명에게 무기와 실탄을 주고 작전지역에 들어가라고 하면, 반드시 교전과 사고가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어있는데, 부상자라든가 시체 등 실질적인 物證(물증)을 남긴 게 하나도 없다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주장뿐이라는 것이다.

“600명 침투시켰으면 정전협정 위반… 한미연합사, 유엔사 모두 가만 있지 않았을 것”

그는 “만약 북한이 정말 600명을 침투시켰다면 굉장한 사건이다. 停戰(정전)협정의 위반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한미연합사가 戰·平時(전평시)를 막론하고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미상호방위 조약에 따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어야 한다. 그러나 한미연합사나 유엔사의 어느 누구도 이를 인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채널A가 보도했던 북한 특수군 출신이라는 탈북자 김명국(가명) 씨의 “50명이 광주로 들어갔고 국군과 교전해 3명을 사살했다”는 주장은 “완전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그래도 내가 합참의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었는데 그 정도의 사태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면 그야말로 나라에 사죄해야 할 일이다. 완전 거짓말이다. 50명이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간다? 어떻게 들키지 않고 가나? 50명이 도보로 이동한다고 할 때는 50명의 보급품, 자동차 몇 대 분이 필요할 것이다. 탄약, 식량 등 어떻게 수송했을까? 그런 부대이동을 어떻게 합참이 몰랐겠는가? 우리 사병을 3명이나 사살했다? 그러면 戰死(전사)보고가 올라올 것 아닌가? 국민들이 자식을 군에 보내고 있다. 자기 아들, 동생이 소식이 없어지면 국방부, 합참으로 연락이 온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인터뷰를 마치며 유병현 대사는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첩보(information)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첩보를 정보(intelligence)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증거 없이 말하는 것은 ‘浪說(낭설)’에 불과하다. 국민의 수준이 높으면 첩보와 정보를 구분할 줄 안다. 국민들이 상식적인 판단을 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柳대사는 육사 특7기 출신으로, 초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냈다. 1981년 합참의장을 마지막으로 大將(대장) 예편한 후 4년간 제11代 주미대사(1981~1985)로 활약했다.



李知映(조갑제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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