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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분 사모님' 청부살해 여대생은 엄친딸 '의리의 하지혜'

화이트보스 2013. 7. 25. 11:05

'영남제분 사모님' 청부살해 여대생은 엄친딸 '의리의 하지혜'

  • 양지혜·사회부 기동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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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7.25 03:04 | 수정 : 2013.07.25 10:59

    
	양지혜·사회부 기동팀 기자
    양지혜·사회부 기동팀 기자
    여대생 청부살해 ‘영남제분 사모님’ 사건의 희생자 고(故) 하지혜 양의 아버지는 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내 딸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예뻤던 아이”라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딸 있어서 좋겠다”고 마냥 부러워하던 ‘엄친딸’이었습니다. 예쁘고, 날씬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잘했습니다.

    ‘의리의 하지혜’라고 불릴 정도로 성격도 좋고 명랑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12년 내내 반장을 도맡았습니다. 교내에 왕따 사건이 벌어지면 주동자를 쫓아가 호통을 칠 정도로 정의감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평소 꿈꾸던 대로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헌신하는 법관’이 되고자 1999년 이화여대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어디서든 ‘착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는 딸이었지만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후에도 하루 용돈을 만원 이상 주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여대생들은 용돈을 넉넉하게 주면 사치스럽게 쓴다”고 충고해 일부러 딸이 빠듯하게 지내도록 했습니다.

    교통비와 식비 해결하고 나면 머리핀 하나 마음대로 사기 힘든데 지혜양은 아버지의 생신날 고급 넥타이를 선물해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어떻게 돈을 모았느냐고 물으니 싱긋 웃고만 말았다고 합니다.

    
	故 하지혜 양/ 조선일보DB
    故 하지혜 양/ 조선일보DB

    친구들도 세심하게 챙겼습니다. 지혜 양의 다이어리에는 빽빽하게 들어찬 사법고시 공부 일정 못지 않게 친구들의 근황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A, 어제 남자친구와 헤어져 많이 속상해 함. 위로 필요’ ‘B, 1차시험 무난히 합격한 듯. 내가 점심 쏜다’ 등의 메시지를 남기며 친구의 일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친구의 생일 케이크도 지혜 양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3년여 동안 시달린 지독한 미행은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신입생 때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친구들끼리 매일 얼굴을 맞댔지만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어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업에 지각하는 법이 없었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이나 기숙사로 바로 달려가 사법고시 준비에 열중했습니다. 식당에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빵을 들고다니며 공부에 몰입해 친구들이 ‘빵지혜’로 놀릴 정도였습니다.

    다만 휴대폰 번호가 한 두달 간격으로 자주 바뀌었던 것이 약간 이상했다고 친구들은 기억합니다. 그리고 2002년 3월 6일, 체력단련을 위해 새벽녘 수영장으로 향하던 지혜 양은 미행 일당에게 납치돼 머리에 공기총 6발을 맞고 숨졌습니다.  

    
	고 하지혜씨의 고등학교 졸업식날 찍은 사진/하지혜씨 가족 제공
    고 하지혜씨의 고등학교 졸업식날 찍은 사진/하지혜씨 가족 제공

    ◇“내가 사는 이유”

    지혜 양이 사촌 오빠인 자신의 사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망상으로 청부 살해한 ‘영남제분 사모님’ 윤모(여·68)씨는 2004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혜 양의 아버지는 강원도 산골로 이사했습니다. 차마 죽지는 못하고, 매일 밤 소주 10병을 마셨습니다.

    “공기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죽을 팔자가 아니었던지 결국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2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어서 아버님께 말씀드립니다”라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의 장기입원환자 평가심의위원회 위원인 교수의 제보 전화였습니다. 그때 지혜 양의 아버지는 “딸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교도소에 있을 줄 알았던 윤씨는 4년 넘게 대학병원 특실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었습니다. 윤씨의 공식 병명은 유방암이었지만 형 집행정지 연장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배가 아프다, 눈이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13명의 협진 의사가 윤씨 진료에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윤씨는 당뇨병·우울증·파킨슨증후군 등 12개의 병명이 적힌 진단서를 받아냈습니다. 윤씨는 ‘살인청부 무기징역수’임을 모두가 아는데도 의료진에게 괴팍한 성질을 부려 병원의 1호 기피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지혜 양의 아버지는 “지혜를 위해 아직도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2002년 사건이 발생한 후 1년 넘게 중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등을 오가며 딸을 죽인 범인들을 직접 쫓았던 아버지입니다. 윤씨에 대한 제보 전화를 받고 나선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먼저 방송사에 알리고 침착하게 대응했습니다.

    윤씨의 수상한 형집행 정지 의혹은 지난 4월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처음 전파를 탔고, 이어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보도했습니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냐”며 공분을 터뜨렸습니다.

    진정서가 접수돼도 꿈쩍도 않던 검찰은 언론 보도가 시작되자 부랴부랴 윤씨를 교도소로 돌려 보내고, 윤씨에게 진단서를 발급한 주치의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혜 씨 살해범들이 경기 하남 검단산에서 현장검증 하고 있는모습/ 조선일보DB
    하지혜 씨 살해범들이 경기 하남 검단산에서 현장검증 하고 있는모습/ 조선일보DB

    ◇‘지혜 기자’가 취재하는 ‘지혜 사건’

    저는 최근까지 사회부 기동팀의 서울 강남라인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을 보고 나서 한숨도 못 잤다며 “딸을 둔 부모로서 내가 다 억울하다. 이름도 너랑 같은 지혜던데 너는 더 취재해 볼 수 없냐”고 분노했습니다. “사건이 크게 굴러가겠구나” 하는 직감이 왔습니다.

    6월에 운명처럼 마포라인 기자가 됐습니다. 마포라인은 이번 사건의 핵심인 서울서부지방검찰청과 신촌세브란스병원, 연세대 의대가 모두 몰려있는 곳입니다. 바로 연세대 의대부터 접촉해 윤씨의 진단서를 발급한 주치의가 개교 이래 최초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됐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했습니다.

    이어 세브란스 병원과 서부지검을 밀착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혜 기자님이 부디 잘 취재해주길 바란다”는 지혜 양 아버지의 격려에 사명감까지 느꼈습니다.

    13명에 달하는 윤씨의 협진 의사들은 이력이 화려합니다. 최소한 의대 학과장 대우 이상이며, 대통령 주치의였던 학장도 진료를 했습니다. 직접 만나 본 협진의사들은 윤씨 사건에 대해 “의사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반응과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는 의견으로 절반씩 나뉘었습니다. 윤씨로부터 눈 수술을 청탁받았다는 풍문의 안과의사는 “윤씨의 증세가 수술할 정도가 아니어서 의료인의 양심으로 수술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유방암 수술을 받으면 후유증이 있지만 윤씨의 엄살은 정말 심했다”고 기억하는 내과 의사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돈 주고 좋은 병실에서 좋은 의사한테 진료받겠다는게 무슨 잘못이냐”며 큰 소리치는 의사도 있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검찰이 도장을 찍어 줬으니까 윤씨가 교도소 밖을 나온 건데, 이제와서 왜 의사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윤씨는 영남제분 류모(66)회장의 ‘전 부인’으로 알려졌습니다. 누가 이혼 사실을 최초 보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윤씨의 이혼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영남제분은 이달 초 회사 홈페이지에 “윤씨와 영남제분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호소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씨는 류 회장과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윤씨가 하루 입원비 200만원인 특실에 4년 넘게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혜 양의 아버지는 “대법원 판결 직후부터 영남제분 회장 부부가 이혼했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고 기억합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혼 루머가 중요한 이유는 2002년에도 출처 없는 루머가 돌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변사체로 발견된 지혜 양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경찰서로 몰려든 기자들에게 “숨진 여대생이 원래 사촌 오빠를 좋아했고, 남자를 밝히는 날라리였다”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루머를 그대로 받아 써 ‘여대생 치정 살인’으로 보도한 언론 매체도 있었습니다. 지혜 양을 ‘두 번 죽이는’ 이 루머 때문에 가족은 크게 고통받았습니다. 과연 이혼 얘기는 어디서 흘러나온 것일까요. 윤씨 사건을 모른척하려는 영남제분 관계자가 벌인 언론플레이는 아니었을까요. 루머의 근원을 확실하게 취재하는 대로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안티영남제분 카페 활동 모습/조선일보DB
    안티영남제분 카페 활동 모습/조선일보DB

    ◇‘하지혜 법’

    지혜 양의 아버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하지혜 법’이 제정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돈과 권력의 힘으로 형 집행정지가 이뤄지는 일이 다시 없게 한다면 딸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행법상 범죄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가 어떻게 형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윤씨가 서울 시내 한복판의 대학병원 특실에 나와있을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지혜 양의 아버지가 교정본부에 윤씨의 수감기록 조회를 요청하고 검찰청에 형 집행정지 연장 과정을 문의해봤지만, 당국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피해자 가족에게는 가해자의 수형 기록이 공개되는 법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검찰은 이달 말 수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윤씨와 주치의 사이에 금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진단서는 의사의 고유 권한이라 법적으로 처벌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벌써부터 고개를 가로젓는 검사들도 많습니다.

    지혜 양 가족의 바람대로 “돈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사람있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