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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착각, 오바마의 결례

화이트보스 2013. 10. 14. 10:34

박 대통령의 착각, 오바마의 결례

  • 이하원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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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10.14 03:12

    
	이하원 정치부 차장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독특한 외교·안보 구상을 제시해 주목받은 정치인이다. 2011년 '신뢰 외교(trustpolitik)'를 핵심으로 하는 대북(對北) 정책을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했다. 지난해엔 한·중·일 3국 간의 긴장과 관련, 일본의 책임을 주로 강조한 '아시아 패러독스'를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동북아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두 구상에 동맹국인 미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그는 청와대 입성 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고위 인사와 만날 때마다 이를 힘주어 말해왔다. 이 중에서 박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 구상에 대해선 미국과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2009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던 북한이 태도를 180도 바꿨지만, 미국은 "신뢰성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의 책임을 지목한 아시아 패러독스에 대해서는 한미 간의 입장이 다르다. 박 대통령은 일본 측에서 잘못된 역사 인식을 수정하지 않을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미·일 간 협력을 축소하기를 희망해왔다.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미국은 최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의 서울·도쿄 연쇄 방문을 계기로 명확히 다른 신호를 냈다. 미·일 2+2(양국 외교·국방 담당 장관) 회의에서 미국은 아베 신조 내각이 바라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 박 대통령을 당혹스럽게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판단은 '착각'에 가깝다고 많은 전문가가 지적한다. 미·일 관계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미국은 역사 문제와 동북아 안보는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한다"며 "박 대통령은 아시아 패러독스 개념으로 미국을 설득하면, 미국이 일본을 압박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2기 오바마 행정부의 구성이 달라진 것도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공문서에 일본군 '종군위안부(comfort women)' 대신 '성노예(sex slaves)'로 쓰도록 지시한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에서 물러났다. 존 케리 현 국무장관은 지난 5월 박 대통령의 워싱턴 DC 방문 당시 러시아 출장을 떠날 정도로 강대국 위주 외교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사태로 동맹국 대통령을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희망해왔다. 그런 미국이 굳이 박 대통령이 헤이글 장관을 만나 일본 문제를 거론한 지 3일 만에 이런 발표를 해야 했는지 의문이다. 정치를 '타이밍'과 '말'의 예술로 정의할 경우,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번 일로 체면이 손상됐다고 느낄 만했다.

    만약, 이를 통해 중국을 이전보다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에 경고한 것이라면, 이는 오판(誤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독재 체제의 중국을 국제사회의 규범이 통하는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미국의 이익을 넓히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박근혜·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5월 백악관에서 가진 정상회담을 통해 다정한 모습의 사진을 찍어 공개한 바 있다. 두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자칫 한·미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더 의미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숙제를 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