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이순신 장군이 가신지 400년이 지났다. 400년이라 하면 긴 세월처럼 보이지만 약 13-14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조상들이 이순신과 함께 싸웠던 시기다. 최근에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는 많은 책들이 나왔으며 TV 드라마도 진행 중이고 영화도 나올 모양이다. 상업주의적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추세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래서 역사는 변화하고 발전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순신과 관련한 많은 저술들이 역사적 사료나 각종 문헌 연구와 작가적 상상력에만 의존하다보니 실제 이순신 장군이 누비고 다녔던 현장을 소홀히 다룬 측면이 있다.
1593년 5월 23일(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여수에 진을 치고 있던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하여 거제도 옥포해전을 시발로 연전연승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산포에서 진도 벽파진을 거쳐 목포 고하도 까지 우리의 남해바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필자는 평소 현장을 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다녔던 물길을 답사하고 그 날의 전투상황을 되짚어보기 위해 경남 통영 앞바다의 오곡도라는 섬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지난 5년 간 주말이면 남해바다의 해안포구와 섬들을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현장의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하여 각 고장에서 전해오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채록하였다.

<통영 앞바다 오곡도에서 바라본 비진도 전경>
현장을 답사할 때는 조선시대에 김정호가 그린 정밀 지도인 동여도를 지참하고 다니면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지명들을 현재의 지명과 대조하며 확인하였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의 진해는 현재의 진해시가 있는 곳이 아니고 경남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일대임을 알아냈다. 합포해전 다음날 이순신 함대는 진해바다 고리량 일대를 수색하고 고성땅 적진포로 남하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경우 진해바다는 자연히 진동리 앞 바다가 되며 고리량은 마산시 구산면 저도(돝섬) 일대가 된다. 필자가 제포를 취재하러 진해시 웅천동에 갔을 때 이 마을의 양상조(74) 옹은 예전에 큰 태풍이 오면 제포 사람들은 구산면 끝을 돌아 돝섬 근처의 고리량으로 피항을 갔다는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최초로 거북선이 참전한 사천해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와 주문리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 장군이 적선 13척을 수장시킨 사천선창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매립사업 때문이다. 지형도를 분석하고 현지 주민 및 사천시 담당 공무원의 이야기를 종합한 뒤 다시 난중일기를 보면 사천선창은 선진리왜성 동남쪽의 매립지인 간사지들(일명 오시환씨들)과 조금마을 일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2차 당항포해전이 있었던 1594년 4월 23일부터 4월 24일까지 이순신은 거제도 북단의 증도(甑島)에서 진을 치고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와 오리량(마산시 구산면 고리량), 저도(돝섬) 일대에서 적선 31척을 불살라 버린다. 여기서 증도라고 하면 마산시 구산면 끝의 원전리 앞에 있는 실리도를 말한다. 지도상에는 실리도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지금도 이 섬을 시리섬이라 부르고 있다. 증도라고 할 때 한문으로 '증(甑)'자는 시루 증자이기 때문이다. 거제도와 마산시 구산면 사이에 있는 이 섬을 지키고 있으면 왜군은 그들의 소굴인 웅천이나 부산포 쪽으로 도망갈 길이 없게 된다. 이처럼 이순신이 다녔던 해안포구나 섬 이름 하나도 현장을 가봐야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1592년 8월 13일 한산대첩이 있기 하루 전에 일본의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웅천을 출발하여 견내량(見乃梁)에 오후 2시쯤 도착한다. 견내량은 폭이 400-500미터 정도의 협소한 해협으로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견내량 부락이 마주보고 있고 요즘 그 위로 거제대교가 놓여 있는 곳이다. 필자가 이 곳을 찾아 왜 '견내량'이라고 하는지 지명의 내력을 묻자 바지락을 캐던 할머니 한 분이 "갯내량은 한시(음력 보름과 그믐) 때 물이 냇물처럼 펄펄 날아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고 했다. 필자는 이 곳에서 '갯내량'이란 사투리를 듣고 '개'는 바다를 뜻하고, '내'는 냇물(川)을 의미하며, '량'은 명량이나 노량이 그러하듯 협소한 해협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냈다. 이 곳은 좁은 목(Bottleneck)으로 썰물이나 밀물이 흐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 무동력선을 운항하기가 어렵고 좌초하기 쉬우며, 이러한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배가 뒤엉켜 일대 혼전이 불가피해 보였다. 현장답사를 해보면 육박전보다는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특기로 하는 이순신 함대가 이 곳 견내량에서 적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하여 끌어낸 후 섬멸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한산만 전경: 한국관광공사 제공>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16일 옥포해전을 치르고 오후 늦게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장목면 구영리)에서 1박하기 위해 항해하던 중 척후선으로부터 적선 5척이 합포 부근을 지난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출동하여 합포 깊숙이 쳐들어가 적선을 모두 불사르고 남포(마산시 구산면 난포리)로 내려와 1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합포해전이 있었던 장소가 어딘가에 대해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고 있다. 요지는 당시의 합포는 현재의 마산이 아니고 진해근처의 합포라는 것이다. 당시의 문헌에 의하면 지금의 마산은 합포가 아닌 창원땅 마산포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도 진해 근처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동여도를 자세히 보면서 현장을 답사한 결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여도에는 창원땅에 합포와 마산포가 나란히 나오고, 월영대와 함께 오늘날의 무학산에 해당하는 두척산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진해 근처에는 원포라는 조그만 포구와 장복산, 안민령 정도가 나올 뿐 어디에도 합포는 없다. 오늘날 진해시 인근의 합포라고 하는 것도 진해시 원포동 수치 인근의 학개(鶴浦)를 두고 하는 말이며 임란 당시의 합포(合浦)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세월은 지나도 현장은 웅변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에서 거제도 옥포를 치기 위해 제1차 출동을 했을 때의 출동로를 살펴보면 1592년 6월 13일 새벽 2시경 여수를 출발하여 남해도 미조항을 돌아 소비포(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서 1박한 후 다음날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진출하여 원균의 경상우도 수군과 연합함대를 편성한다. 다음날 인 6월 15일에는 거제도 남단을 돌아 거제 동안의 송미포(남부면 다대리)에서 1박하고, 그 다음날인 6월 16일 정오 경에 옥포로 진격하여 적선 26척을 격파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둔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여수에서 출동한 이순신 함대가 거제도 옥포를 치려면 상식적으로는 남해 노량을 지나 판데목(통영대교 아래 좁은 해협)과 견내량(거제대교 아래 좁은 해협)을 통과하여 거제도 북단을 경유하여 옥포로 접근하는 것이 가까운 길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굳이 거제도 남단을 돌아서 먼 거리를 우회했다. 필자가 나름대로 추측해보니 전쟁 발발 후 첫 번째 출동이라 정확한 적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좁은 해협을 통과하다가 복병을 만나면 낭패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맑은 날 가시거리가 20㎞ 쯤 확보되는 넓은 바다를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자기 수백 척의 왜군 선단이 나타나면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후퇴나 피신을 할 수 있는 시야가 트인 넓은 바닷길을 택했다고 본다. 역시 현장을 가보지 않고는 이러한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서산에 낙조가 걸리면 통영시 산양읍 삼덕항(당포)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포구에서 1592년 7월 10일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날 날씨도 화창한 당포에는 왜군의 전함 대선 9척, 중선10척, 소선 2척 등 21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고 육상에는 당포성을 점거한 왜병 300여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선이라고 하면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과 비슷한 아다케(安宅船)를 말하며, 중선이란 세키부네(關船)을 말하고 소선은 작은 관선으로 고바야(小早)를 말한다.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7월 9일에 적정을 수집하면서 사량도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적이 당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거북선을 선두로 하여 당포로 진격해 갔다.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거북선은 적 함선 중 대장이 탄 누각이 있는 배를 향하여 돌격하고 그 뒤를 따라 전 함대가 함포사격을 하면서 돌진하였다. 마치 서해교전에서 우리 고속정이 북한 함정을 들이받아 밀어내듯이 거북선 돌격장 이기남은 거북선으로 누선 밑을 들이박아 깨트려버렸다. 순간 판옥선에서는 집중포화가 적선을 향하여 계속 불을 뿜었다. 거북선에 들이박혀 서서히 침몰하는 적 대장선을 향하여 중위장 권준이 활로 적장 구루시마(龜井眞矩)를 맞추자 휘하의 군관들이 배로 뛰어올라 적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대장선인 누선이 파손되고 적장이 죽자 적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오합지졸이 되어 육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적 함대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여세를 몰아 육상의 적까지 추격하려 하였으나 마침 왜군의 대선 20여 척이 다수의 소선을 거느리고 거제도 방면으로부터 접근해 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어 육상의 적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을지는 당포의 방파제에 서서 그 당시를 상상해 보았다. 무전기와 같은 통신수단이 없던 그 시절에 또 다른 적선이 접근한다는 급보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순간 연대도 생각이 났다. 거제도 방면에서 추도 쪽으로 진출하려면 비진도나 용초도 근처를 지나 오곡도 근처로 나와야 하는데 이 경우 연대도 산 꼭대기에서 보면 환히 관측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연대도에서 봉화를 올려 이순신 함대의 탐망선과 교신했던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할 뿐이다. 현장을 보아야 이러한 상상도 가능한 것이다. 이순신을 말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보아야 한다. 장군이 누볐던 남해바다는 오늘날까지도 청정해역에 남도의 인심이 훈훈하게 묻어나는 곳이 대부분이다.

<당포가 있는 미륵도의 산양 일주도로에 핀 겨울 동백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