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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패자’ 앨 고어와 문재인

화이트보스 2013. 11. 7. 15:53

대통령선거 패자’ 앨 고어와 문재인

기사입력 2013-11-07 03:00:00 기사수정 2013-11-07 03:00:00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승부의 세계에서 억울하지 않은 패자는 드물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 선거의 패자라면 그 억울함의 정도를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진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도둑맞았다고 한다면 그 후보자의 심정은 어떨까.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 댓글 사건을 계기로 “대선이 불공정했다”며 대통령 책임론을 선언한 문재인 의원을 보면서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올 6월 조 바이든 부통령은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행사에서 서슴없이 “그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고어를 소개했다. 2000년 대선의 패배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13년이 지났는데도 고어를 대통령 당선자라 불렀을까.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작고)의 부인인 비키 씨는 “우리 집에서는 그를 대통령이라 부른다”고 맞장구를 쳤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조지 W 부시에게 승리를 넘겨준 고어는 그 뒤 줄기차게 “대통령을 도둑맞은 후보”라 불리고 있다. 여전히 민주당 관계자들은 고어가 승리했다고 믿고 있으며, 아직도 학계와 언론에서 선거 결과에 대한 논쟁은 뜨겁다.

고어는 선거 후 부시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선거의 마지막 승부처는 플로리다 주였다. 투표가 끝나기 직전 일부 텔레비전 방송은 출구조사를 바탕으로 고어의 승리를 예측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1월 8일 오전 2시 16분, 방송사들은 개표 상황을 보면서 ‘부시의 승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14분 뒤 고어는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시인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1시간 뒤 고어의 선거본부에서는 방송사들이 예측을 잘못했다고 판단했다. 승복 텔레비전 연설을 위해 고향으로 가던 고어는 바로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과 축하를 취소했다. 개표가 초접전으로 진행되자 방송사들도 ‘부시의 승리’를 정정했다. 표차가 워낙 적어 플로리다 주법에 따른 재검표가 불가피해 보였다. 그로부터 36일 동안 고어와 부시 진영은 미국 선거 사상 유례없는 정치적, 법적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플로리다 주 대법원의 재검표 진행 결정을 뒤집으며 재검표를 중단시켰다. 플로리다 주정부가 당초 선언했던 537표 차의 부시 승리를 인정했다. 고어는 미국 전체 투표에서 이기고도 플로리다 선거인단을 뺏기면서 패자가 되었다. 민주당 등 야권은 부시의 동생이 지사인 플로리다 주정부가 부당하게 재검표 중단을 지시했다며 관권 개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보수적 대법관들이 사법 쿠데타를 일으켜 극단적 우익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고어에게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불복하고 다시 소송을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고어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참모들에겐 짐을 꾸려 플로리다를 떠나 워싱턴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그러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나와 부시 모두 이렇게 길고 어려운 과정을 예상하지 않았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연방대법원이 결정했습니다… 나는 법원의 결정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국민의 통합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나는 승복하겠습니다. 나는 대통령 당선자를 존중하고 그가 독립선언문이 정의하고 헌법이 확언하는 위대한 비전을 이행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뭉치도록 하는 것을 돕는 책임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많은 지지자들이 실망하는 것을 잘 압니다. 나 역시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망은 나라 사랑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국민에게, 특히 우리를 지지했던 모두에게 새로운 대통령을 지지하여 단결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제 정치적 투쟁은 끝났습니다.”

고어는 연설이 끝난 뒤 부시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어 다시 축하했다. 어떤 정치인도 자신을 꺾은 사람에게 흔쾌한 심정으로 전화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나 해야만 하는 것이 정치이다. 한 사람에게 세 차례나 전화한 고어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2012년, 개표 당시 플로리다 주 국무장관이 고어를 찍은 800장의 투표용지를 보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승리에 충분한 표였다. 그러나 고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올 4월, 연방대법원의 다수 결정에 동참했던 샌드라 오코너 대법관이 판결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고어는 “어떤 경우에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정치적 시비에 연방대법원을 휘말리게 할 필요가 없다”며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미 자신을 떠나버린 대통령 직에 대한 고어의 담백하고도 일관된 태도와 처신은 정치의 미학을 보여 준다.

댓글 등이 선거에 끼친 영향력을 계량할 수 없는 상황이며, 어떤 경우에라도 그것이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문재인 의원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은 정치인의 결단이어야 한다. 결과에 승복하고 승자에 대한 존중을 다시 한 번 확언하는 것이 정치인 문재인의 도리이다. 그것이 그가 대나무처럼 한 마디 더 성장하는 것이다. 더욱이 국가 지도자가 되길 원한다면 국민에게 자신의 억울함보다 단결을 호소하는 깨끗한 패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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