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사회 , 경제

DJ, “꿈을 가지라”며 대권 도전 부추겨

화이트보스 2014. 1. 4. 16:34

DJ, “꿈을 가지라”며 대권 도전 부추겨

정리 :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 1997년 大選 한 달여 전에 DJ 제안으로 캠프 합류
⊙ 당 대표 시절 DJ에게 박지원에 비판적인 당내 여론 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 노무현, 장관 시절부터 ‘민자당 출신 당 대표’라며 비판
⊙ 光州 경선 비롯한 2002 민주당 경선에 ‘보이지 않는 손’ 작용

金重權
⊙ 74세. 고려대 법학과 졸업. 단국대 법학박사.
⊙ 대구지법 영덕지원장, 국회의원(11~13대), 민정당 사무차장, 국회법사위원장,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청와대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同대표최고위원 역임.
  김영삼(金泳三·YS)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지구당 위원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민주자유당에서 통일국민당 소속 이학원(李學源) 의원을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서운했다.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어려운 정국 상황을 잘 조율하면서 YS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일조(一助)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YS 측에서는 내가 좀 더 팔을 걷어붙이고 자기들을 도와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될 일이 아니었다. 민자당 경선(競選) 과정에서 이종찬(李鍾贊) 후보 측에서 당시 손주환(孫柱煥) 정무수석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문제를 삼았었고, 가을에 접어들면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에는 YS나 최형우(崔炯佑) 의원이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했다. YS부인 손명순 여사가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YS는 집권하자마자 내 지역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미국 LA교민회장을 지낸 대학 친구인 L은 최형우 의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내게 “안기부 파일에 네가 대권(大權)에 도전할 유망주(有望株)로 되어 있어서 견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비서실장이 된 후, 나는 그 파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도 후일 내가 김대중(金大中·DJ) 정권의 비서실장이 되어 인사를 갔을 때, “김 의원은 당시 민정당 젊은 의원들 가운데 주목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지역구를 빼앗긴 나는 단국대와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후학(後學)들을 기르면서 재기(再起)를 노렸다. 하지만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울진·봉화 지역구는 최형우 의원이 내무부장관 시절 감사관으로 데리고 있던 김광원(金光元·15~17대 의원)씨에게 넘어갔다.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를 강행했지만, 그곳은 무소속 간판으로는 당선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DJ와의 만남
 
DJ는 비서실장인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1997년 10월 말경이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와는 정무수석 시절 일 때문에 만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 서울 마포 서교호텔에서 DJ를 만났다. 류재건(柳在乾)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DJ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저는 총재님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대선(大選)에서 DJ를 지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YS 정권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는 호남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DJ는 반색을 하면서 “국민회의에 입당(入黨)해서 도와달라”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지역감정이 엄존하는 상황 아래서 DJ당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재기의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DJ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지역구에 내려가서 그동안 저를 지지했던 분들의 동의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셨던 노태우 전 대통령께도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다음 날 나는 울진으로 내려갔다. 차가 대관령을 넘을 즈음, 카폰이 울렸다. 안기부 모(某) 간부였다. 그는 “DJ를 돕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정치생명이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역구에 내려가 지지자들에게 DJ의 제안을 설명했다. 모두 반대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DJ를 지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이틀 후, 수감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의 행보가 그분의 종용에 의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大選전략자문회의
 
1997년 12월 대선 직후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사실상 대통령비서실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98년 2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내정자를 발표하는 모습.
  DJ는 조선호텔 식당에 국민회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나를 인사시켰다. 조세형(趙世衡) 총재권한대행, 박상천(朴相千) 의원, 정동영(鄭東泳) 대변인, 이강래(李康來, 전 정무수석비서관·16~18대 의원) 기획특보 등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DJ는 내게 대선전략자문회의(일명 마포회의) 의장 자리를 맡겼다. 이미 국민회의에서는 대선기획본부(본부장 이종찬)가 한창 가동 중이었다. 자칫하면 옥상옥(屋上屋)이 될 우려가 있었다. DJ는 “대선기획본부 차원을 넘어서는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아달라”면서 당장 그날 회의부터 주재하라고 했다. 나는 “오늘은 첫날인데, 제가 어떻게 회의 진행을 하느냐. 조세형 권한대행께서 하는 게 좋겠다”고 사양했다.
 
  대선전략자문회의는 마포 가든호텔(현 홀리데이인 서울) 14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강래 특보가 간사 역할을 했다. DJ는 회의 중에 나를 찾는 전화를 자주 걸어왔다. 막상 전화를 받아보면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나를 자주 찾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캠프 신참자(新參者)인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선에서 DJ는 이회창(李會昌) 신한국당 후보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는 그걸로 내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DJ캠프에 몸을 담기 전에 이미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학교에서 총장직을 제안해 와서, 1998년 3월부터 총장직을 맡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