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전 총리·본사 고문
사회와 국가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기에 87년 체제를 리모델링 또는 개조하려면 흥분이 아닌 극도의 인내와 지혜가 요구된다. 우선 헌법개정을 외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겠지만 이는 자칫 현재의 정치적·사회적 대결구도와 논쟁을 그대로 연장하며 가열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의 우리 체제가 지닌 병리현상을 치유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확실한 진단과 이에 기초한 처방을 내리는 필수과정이 정치권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진지하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처방을 구체화하는 데는 당연히 개헌 논의도 필요하게 되겠지만 이를 리모델링의 출발점으로 삼기보다는 한국 민주정치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노력이 개조작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겠다.
사실 지구촌의 21세기는 선진민주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예외 없이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듯 불안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87년 민주화체제는 비교적 잘 버텨왔다고 자타가 공인할 만하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87년 체제의 해체가 아니라 선진 민주복지국가로 향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불합리한 관행을 정리하는 리모델링에 착수하자는 것이다.
리모델링 작업의 첫 번째 과제는 87년 체제의 한계에 대한 회고와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장기집권에 대한 제어장치를 우선해야 되겠다는 광범위한 집념의 결과로 채택된 5년 단임제의 기본 취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다만 4년 중임제, 즉 국민의 신임을 물어 대통령이 8년까지 집권할 수 있게 하자는 대안도 신중히 검토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권력의 집중에 대한 견제의 제도화 문제다. 우리의 정치문화에선 제왕적 권력집중을 반대하면서도 무작정 표류하는 토론이나 협상보다는 적시에 결단하고 실천에 옮기는 강력한 리더십을 선호하는 이율배반적인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대통령으로의 과도한 권력집중을 견제하며 국민의 뜻과 힘을 국가운영에 제대로 주입하는 대의(代議)제도, 특히 국회와 정당의 위치와 활력을 어떻게 정상화하느냐가 한국 정치 리모델링의 핵심과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미 고전적인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장 사이의 양자택일식 대결구도는 유효성을 잃었다는 것이 현대 정치이론의 보편적 결론이다. 그러기에 국가와 시장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계시키느냐가 국가발전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여야 정당은 물론 각계각층이 양극단은 좁혀가고 중간을 확대하여 분열보다는 통합을 촉진하는 새로운 자세와 정책을 가다듬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한 출발이 이루어지면 개헌을 포함한 리모델링 작업이 조용히, 그러나 순조롭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