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정도전’, 줄 잘 서야 하는 정치인 보여주는 것” 조선왕조실록 작가 신봉승

화이트보스 2014. 3. 10. 17:50

정도전’, 줄 잘 서야 하는 정치인 보여주는 것” 조선왕조실록 작가 신봉승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 입력 : 2014.03.10 16:16 | 수정 : 2014.03.10 16:22

    
	[조선pub]“드라마 ‘정도전’, 줄 잘 서야 하는 정치인 보여주는 것” 조선왕조실록 작가 신봉승
    1980년대 방송가를 석권한 바 있는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의 작가인 신봉승 선생을 최근 만날 기회를 가졌다. 현재 예술원 회원인 신 선생은 조선왕조에 대한 상당한 권위이다. 신 선생은 최근의 드라마 <정도전>을 호평하며 정도전 등에 대한 개인적인 평을 말해주었다. 다음은 신 선생과 가진 한담의 주요 내용.

    -드라마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지난 10년 동안에 나온 역사 드라마 가운데 최고이다. 사실에 부합하며 재미있다. 매우 건전한 드라마이다. 나는 요즘 이 드라마만 본다.”

    -정도전은 어떤 인물인가
    “조선 왕조 5백년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며 지식인으로서는 최고 수준이다. 그가 갖고 있던 학문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성계가 경복궁을 완공한 후 전각의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 많은 전각의 이름을 정도전이 다 지었다.”

    -또 다른 예는?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꼭 기억할만한 글귀가 있다. ‘도끼를 든 자를 여름 산에 넣지 말고 그물코가 작은 그물을 가진 자는 냇물에 넣지 말라’는 문장이다. 치어를 잡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라는 것이다. 6백년 전에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언급한 대목이다. 그 학문의 깊이는 지금의 사람으로서도 형언하기 어렵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이기고 하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만일 정도전이 방석이 편에 서지 않고 이방원 편에 섰다면 본인은 물론 손자까지도 영의정을 지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섰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줄을 잘못 서면 망한다.”

    -얼마나 망했나?
    “정도전은 살해당한 후 고종 때까지 5백년 간 조선에서는 누구도 삼봉 정도전을 거론할 수 없었다. 충청도 어느 고을의 원이 봉우리 세 개가 잘 내다 보이는 방이 있는 집에 살았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자네 삼봉과 마주 앉았군“하고 농담을 건내자, 그 고을 원은 놀라서 집을 헐어버렸다. 이처럼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현재의 경복궁 전경. 흥선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은 일제를 거치면서 전각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중이다./조선DB
    현재의 경복궁 전경. 흥선대원군이 복원한 경복궁은 일제를 거치면서 전각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중이다./조선DB
    -그러면 언제 ‘복권’됐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했는데 지도를 보니까 전각에 이름이 다 있었다. 그 많은 전각에 이름이 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너무 놀라서 누가 이름 지은거냐 하고 물으니 정도전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대원군이 정도전의 무덤이라도 찾아서 제사지내고 전각 이름은 그대로 붙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광화문, 근정전, 교태전, 사전정 등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정도전의 무덤은 찾지 못했다. 이전까지 4백년 간 정도전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정도전이 줄을 잘못 섰다는 이야기는?
    “이성계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첫째 부인의 소생이자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방원(태종)이 이에 반발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을 모두 죽였다. 방원은 특히 정도전은 직접 죽였다.”

    -정도전은 왜 실력자인 방원 편에 서지 않았는가?
    “내가 일평생 가졌던 의문이다. 해석이 잘 안된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방원을 제치고 열두살짜리 방석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참으로 추측하기 어렵다. 정도전이 당시에 살아 있는 권력 실세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권력의 실세는 방원보다도 신덕왕후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방원보다도 신덕왕후가 실세였나?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지금 사람들은 당시의 가족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고려말 사대부들은 부인을 두 명 두었다. 고향에 두는 향처와 수도에 두는 경처이다. 둘은 평등하다. 누구도 지금의 후처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성계는 향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 )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큰 아들 방우, 방원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경처인 신덕왕후 사이에는 방석 등 아들 둘을 두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방우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기 3개월 전에 한씨 부인이 포천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방우는 아버지의 조선 건국에 반발하여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떠났다. 그럴 경우 승계의 순위는 무너진다. 그 다음인 방원이 왕위를 이어 받는 게 아니다. 이성계는 살아 있는 경처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정도전은 살아 있는 권력인 신덕왕후 편에 줄을 섰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권력의 실세라 해도 이성계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어렵지 않았을까?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이성계는 정동의 옛 경기여고 자리에 신덕왕후 무덤을 쓰게 하였다. 당시에는 경복궁 누각에서도 보이는 자리였다. 이성계가 경복궁에서 신덕왕후의 무덤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말이 되겠지”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싫어했나?
    “이성계가 사망하자 이방원은 신덕왕후 무덤에 있던 석물들을 모두 들어냈다. 그리고 그 석물들로 청계천이 시작되는 현재의 동아일보 앞에 해정교를 지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신덕왕후의 무덤에 있던 석물들을 밟고 가게 하였다.”
    
	청계천 광통교 남측 석축에 신덕왕후의 무덤 병풍석 12개중 6개가 사용되었다. 이중 사진의 3번과 5번은 거꾸로 박혀 있다./사진출처 ohyh45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hyh45&logNo=20161372035)
    청계천 광통교 남측 석축에 신덕왕후의 무덤 병풍석 12개중 6개가 사용되었다. 이중 사진의 3번과 5번은 거꾸로 박혀 있다./사진출처 ohyh45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hyh45&logNo=20161372035)

    -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나?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무사들을 동원하여 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은 이성계가 보는 앞에서 직접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다.”

    - 선생이 집필한 대하드라마 조산왕조실록에 정도전이 나오는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의 첫 부분이 ‘추동궁 마마’이다. 추동궁은 개경의 한 동네이고, 추동궁 마마는 이방원의 부인을 지칭했다.”

    -선생이 쓰신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은 어느 정도 나오나
    “드라마 ‘추동궁 마마’는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을 이방원으로 설정했다. 이 드라마 이전까지는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나 국민들의 머릿속에서나 태종 이방원은 그냥 하나의 왕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 드라마가 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실록 등 고증한 자료들, 즉 사실에 입각하여 태종의 성격과 행적을 재구성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태종을 사람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다. 태종은 어떤 면에서는 이성계보다도 더 조선 건국의 주역이다. 내 드라마의 주인공은 태종이었다. 정도전은 단역으로 나왔다.”

    -정도전을 좀 더 비중있게 다를 수도 있었을 텐데...
    “정도전을 좀 더 쓰고 싶었다. 정도전의 자료는 삼봉집뿐이었다. 실록이나 삼봉집이나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어렵다. 실록을 열심히 읽어가며 태종에 인간의 모습을 입힌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자부한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계는?
    "이방원은 하륜(河崙, 1347 ~ 1416)의 소개로 정도전을 알게 된다. 정도전이 없는 조선 건국은 생각하기 어렵다. 조선의 근간을 이룬 법전이 경국대전이다. 이는 성종 때 완성되었지만 초본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이방원 같은 인물이 요즘 말로 하면 쿠데타를 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천재적인 이론가가 필요하다. 정도전은 바로 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 정도전을 알아본 하륜도 더 대단한 인물 아닌가?
    “조선 왕조 초기에는 하륜만한 명물이 없다. 우선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했는데 개경 사람들이 인정을 안했다. 그래서 천도하려 했다. 처음에는 계룡산 신도안으로 수도를 이전하려고 전국의 석수장이 대장장이를 불러 기본공사를 시작했다. 이 때 하륜이 그곳은 물이 없어 도읍이 될 수 없다고 간언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하륜은 한양이 적당한 곳이라 해서 서강 주변, 현재의 서강대 홍익대 자리에 터를 잡았다. 나중에 무악대사가 도읍은 한강 부근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경복궁으로 되었다.

    하륜도 대학자였다. 대학자들은 관상도 잘 본다. 하륜이 이방원의 장인 민씨에게 사위를 데려와 보라고 해서 만난 일이 있다. 즉각 제왕지상임을 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방원의 목숨을 두 번씩이나 구해준 사람도 하륜이었다. 이방원이 방석을 죽이고 왕이 되자 이성계는 상심하여 함흥으로 갔다. 방원이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가 함흥에 가 있으니 왕 노릇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귀환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면 다 활로 쏴 죽였다. 그래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왔다. 이성계는 태종의 간청에 따라 귀환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태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마중나온 태종을 활로 쏴 죽이려 하였다. 이 때 하륜이 태종에게 천막 기둥을 굵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옆에 있으라고 간언하였다. 이성계가 멀리서 태종을 겨냥하고 활을 쏘았는데 화살은 이방원의 옆에 세워진 굵은 기둥에 박혔다. 아버지의 화살을 겨우 피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잔치가 벌어졌는데 방원이 술잔을 올리는 순서였다. 하륜은 술잔은 내시가 올려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시가 이성계에게 술잔을 올리자, 이성계는 품안에서 철퇴를 꺼내 잔칫상을 내리쳤다. 방원이 술잔을 올릴 때 쳐죽이려 준비한 철퇴였다. 그런데 내시가 술잔을 올리자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네 놈은 하늘이 넨 명(命)이다”라고 탄식하였다.“

    - 수양대군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한명회와 정도전을 비교한다면...
    “한명회의 스승인 유방선(柳方善)은 ‘내 제자들 가운데에는 서거정, 한명회, 권람이 으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 한명회는 책사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에 정도전은 학자이다. 정치인으로서는 한명회가 예감을 가지고 정치를 했다면, 정도전은 논리를 가지거 정치를 했다고나 할까...”

    -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아쉬운 점은
    “정도전이 이방원의 편에 섰다면 손자까지도 영의정을 했을 것이다. 정치인은 항상 줄을 잘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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