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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에 범인 잡았다고 했는데 무죄 선고…또 미궁속으로 빠진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

화이트보스 2014. 6. 9. 21:17

15년만에 범인 잡았다고 했는데 무죄 선고…또 미궁속으로 빠진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

  • 최재훈
    특별취재부 기자
    E-mail : acrobat@chosun.com
    고향 ‘대구’를 학교폭력의 도시로, 대형참사의 도시로, 해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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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06.09 10:50 | 수정 : 2014.06.0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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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10월 17일 새벽 5시10분, 계명대 간호학과에 다니던 정은희(당시 18세)씨가 대구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화물트럭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 밤 대학축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학교를 떠난 지 6시간 만이었다.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얼마 뒤 현장 근처 가드레일에서 속옷을 발견한 유족들은 성폭행·살인 의혹을 제기했다. 유족들이 영안실에서 확인한 사체에도 속옷이 없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건 아줌마들이나 입는 속옷이다. 이게 어떻게 아가씨 속옷이냐”며 유족들의 주장을 무시했다.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채소를 팔던 정씨의 아버지 정현조씨는 생업을 접고 딸의 사인을 밝히는 데 매달렸다. 경찰들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고, 청와대·법무부 등에 진정과 탄원을 넣었다.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던 사건, 생업 포기한 유족들 노력으로 15년만에 재수사 착수
    검찰, 공소시효 한달 남겨 놓고 스리랑카인 구속기소

    검찰은 사고 발생 15년 만에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작년 9월 정씨를 성폭행하고 금품을 뺏은 혐의(특수강도강간 등)로 스리랑카인 K(48)씨를 붙잡았다. 공소시효(15년)를 한 달 남겨둔 시점이었다. 검찰은 “K씨 등 스리랑카인 산업연수생 3명이 술에 취한 정씨를 강제로 자전거에 태워 고속도로 부근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뒤 가방에 든 현금과 책을 빼앗았다”며 K씨를 구속기소했다. 나머지 두 명은 이미 스리랑카로 출국한 상태였다. 당시 검찰은 “정씨 속옷에서 검출된 DNA가 K씨의 DNA와 일치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넉달 뒤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대표적 민원 해결 사례로 꼽으면서 이 사건은 또 한번 유명세를 탔다.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 일지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 일지
    하지만 대구지법 형사12부(재판장 최월영)는 지난달 30일 K씨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DNA까지 일치했는데, 법원은 왜 무죄를 선고한 것일까. 법조계에선 검찰의 기소 내용에 허점이 많았기 때문이란 말이 나온다.

    DNA 일치했지만 특수강도 혐의 확증 못해 사실상 무죄 선고 받아

    K씨의 주된 혐의는 특수강도강간. 검찰이 강간에 특수강도 혐의를 끼워넣은 것은 공소시효 때문이었다. 공소시효가 10년인 특수강간에 특수강도 혐의까지 더해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효가 지나 K씨를 기소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특수강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씨의 가방 속에 책이 들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공범 B씨의 전문진술(傳聞陳述)만으로 피고인들이 책을 뺏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사건 현장에 출동한 119구급대원과 사고트럭 운전사가 ‘현장에서 찢어진 책장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봤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이들의 혐의를 입증 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선 유·무죄 여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특수강간 등 공소사실에 포함된 다른 개별 범죄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면소를 선고할 뿐 따로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수강도 혐의가 입증되지 않으면 특수강간은 혐의가 인정돼도 시효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는 취지였다.

    검찰은 반발하고 있다. 대구지검 최종원 1차장은 “피해자가 사망해 직접 증거보다 간접·정황증거가 중요한 상황인데 법원은 직접증거에만 집착해 판결했다”며 “K씨가 풀려나 도주할 것에 대비해 출국금지를 요청하고 항소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사건의 유일한 단서였던, 정씨 속옷에서 검출된 남성의 DNA를 근거로 수사를 시작했었다. 2010년 DNA법 제정 이후 검찰과 경찰에서 확보한 강력범죄자 DNA자료를 뒤졌다. 그러다 2011년 여고생과 성매매를 하려다 붙잡힌 K씨의 DNA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3개월가량 추적한 끝에 대구에서 외국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K씨를 찾아냈다. 당시 K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로부터 “K씨와 다른 2명이 자전거에 여자를 태우고 가는 것을 봤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당시 수사 검사는 이미 산업연수를 마치고 스리랑카로 간 공범 B씨와 C씨에 대해 2~3차례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로부터 “K씨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현재 우리나라와 스리랑카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아 이들을 데려올 수는 없는 상태다. 현재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한국에 머물고 있는 K씨는 수차례 성범죄 전력이 있었다. 수사 당시 그의 휴대폰에선 자신이 성관계한 여성들의 나체사진 수십장이 발견되기도 했다.

    15년 전 숨진 대구 여대생 정은희씨의 아버지 정현조씨.
    15년 전 숨진 대구 여대생 정은희씨의 아버지 정현조씨.

    가장 큰 책임은 초동수사 엉터리로 한 경찰
    정씨 아버지 “15년동안 제대로 조사해 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렸는데 허탈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특수강도 혐의 입증에 실패하면서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여기엔 공소시효에 쫓긴 검찰 수사의 한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초동수사를 잘못한 경찰의 책임이 크다. 재수사를 요구하는 유족들을 통해 사건이 조금씩 알려지자, 경찰은 사고발생 5개월만에 정씨의 속옷을 국과수에 보냈고, 유족에겐 “시료가 오염돼 감정이 불가능하다”고 거짓 통보를 하기도 했다. 경찰은 뒤늦게 사체를 안치했던 병원 직원들을 조사해 “사고 당시 정씨가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사체 수습을 위해 칼로 찢어 버렸다”는 허위 진술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정씨의 정확한 사망 원인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검찰은 “사고 운전자의 진술과 사체의 부검결과, 사고차량의 파손부위 등을 보면 정씨가 선 채로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스스로 뛰어 들었는지, 누군가 뒤에서 밀었는지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은 “혼자서 넘어가기도 힘든 중앙분리대를 넘어 고속도로에서 걸어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초기 조사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씨의 아버지 정현조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했다. “공소시효에 끼워맞추려다보니 엉터리 같은 결과가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15년 내내 제대로 조사해 달라고 울며 불며 매달렸는데 허탈하고 억울하다”며 “내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선 처음부터 전면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