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선박의 규모나 승선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몰랐다.
● 처음 배로 내려가 맨 나중에 헬기로 나오면서 보니 우리 뒤에 아무도 없었다.
● 비극의 출발점은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방송 듣고 선실에 끝까지 머물렀던 정직함이었다.
● 말과 글만으로 사람은 못 살려도 멀쩡한 해경을 박살낼 수 있다니…
● 40여분 동안 172명을 건져 올리고도 우리는 公共(공공)의 敵이 됐다.
● “대통령이 우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모두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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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식 경위 |
항공대는 헬기를 이용해 관할 해역일대의 해상순찰과 수색 구조업무를 주 임무로 맡는 부서다. 나와 같은 항공구조사가 해양경찰 항공대에 정식으로 편입하게 된 것은 금년 2월초. 그 전까지 항공 구조사가 정식 편제에 없었고 해경 특공대에서 파견 근무로 지원 나오는 식이었다가 이번 2월부터 아예 항공대 소속으로 항공구조사 편제가 생긴 거였다. 전국적으로는 동해, 부산, 제주, 인천, 목포 등 5개 항공단이 있고 각 단별 4명씩 항공 구조사가 배치돼 있다. 그러니까 목포항공대에는 네 명의 항공구조사가 근무 중인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엔 구조사 한 명이 부상을 입고 병가(病暇)중이어서 세 명이 근무중이었다. 511호기에는 항공 구조사인 나(팀장과 박훈식 경위)와 김재현 경장이 사무실에 있었고 512호기의 권재준(權在俊) 경장은 헬기에 탑승한 채 출동 중이었다. 그날 511호기에는 항공대장이자 기장인 양해철 경감과 부기장인 김태호 경위, 전탐사인 이명중 경사, 정비사인 김범준 경장 그리고 우리 두 항공구조사가 있는 6인 시스템이었다.
9시 3분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시각에 운항팀에서 최재영 경위가 상황실로부터 온 전화기를 들었다. 경험적으로 이 행동은 우리에게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여객선 침몰. 침몰중인 여객선이…”
수화기를 놓은 崔 경위의 눈빛은 우리에게 “들었지?‘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어서 양해철 항공대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 출동!”
그리고 그 자신도 출동을 위해 주기장으로 달려 나갔다. 긴박한 상황이라 말없이 모두 서둘렀다. 나와 김재현 경장은 곧장 장비실로 뛰어가 검은색 슈트인 부력복(浮力服)으로 갈아입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도 체온손실 속도를 늦추고 어느 정도 부력을 형성해서 오랫동안 수영을 할 수 있는 구조대원의 필수 장비다. 게다가 어느 정도 마찰력을 가진 부츠까지 신으면 웬만한 바위를 딛고 오를 수 있다. 여기다 스노클과 물안경 등 구조장비를 챙겨 들고 헬기를 향해 뛰었다.
그 시각, 전탐사 이명중 경사는 헬기에 올라 영상 채증장비를 점검했고 정비사는 헬기를 체킹하며 피구조자를 인양할 때 사용하는 와어어 권상기(捲上機)인 호이스트(hoist)를 확인했다.
“난생 처음 보는 배였다”
여느 때 같으면 헬기가 시동을 건 후부터 10~15분 정도 예열을 거친 다음 이륙한다. 그러나 이 날은 기장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여객선이란 단어 자체가 많은 인명이 탑승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무조건 빨리 가는 게 최선이었다.
헬기가 이륙한 시각은 9시 10분. 출동 명령을 받은 지 7분 만에 全 대원이 탑승한 채 이륙했으니 무척 빠른 편이었다. 해상(海上)은 안개가 짙게 깔려 섬과 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고도를 높이자 안개 지역에서 벗어났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사고 해역 쪽을 볼 수 없었다. 비행중에 대원들이 헤드셋을 쓰고 있었지만 이 날 우리는 침몰중인 여객선이 있다는 이야기 외엔 승객들의 숫자나 배의 규모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이게 두고두고 아쉬워지는 대목이 됐다.
헬기가 사고 해역에 도착한 시각이 9시 27 분경, 공중에서 바라본 세월호는 난생 처음 보는 배였다. 우리 목포 해경들은 목포-제주간 여객선들과 주변의 웬만한 배들을 좀 안다고 자부한다. 업무 상 한두 번 승선했을 경우 그 배의 기본구조를 다 파악하고 기억하기 때문인데 세월호는 우리의 경험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거대한 선체를 옆으로 한 채 돌아누운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더구나 저 큰 배가 침몰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배 주변엔 약간의 화물과 컨테이너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지만 이상하게 갑판위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객선이지만 승객들은 다행히 많이 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기장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세월호 주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배를 거의 한 바퀴 돌아 선미쪽으로 접근하는 순간 5층 우측통로 난간쪽에 몇 사람이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사람들은 난간을 잡고 모여 있는 듯했다. 기장은 헬기를 구조 지점 10m 상공에서 하버링(hovering·공중정지 제자리 비행)시키며 우리에게 지시했다.
“구조사 투입 준비!”
“안전하게 구조임무 수행할 것!”
먼저 내가 호이스트를 잡고 내려갔다. 金 경장이 다음으로 내려왔다. 기울어진 선박에서 우리가 착지한 지점은 배의 갑판이 아니라 선체 외부의 최상층 난간 위였다. 그만큼 많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구조에 몰두하면 배가 30도 기울었는지 40도 기울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나중에 화면으로 검증했을 때 약 45도 가량 됐다고 한다. 내려가 보니 경사가 심해 탑승객들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5m정도 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金 경장이 통로쪽에 나온 사람들에게 다가가 손으로 잡아끌어 올리면 나는 한 손으로는 헬기에서 내려준 바스켓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金 경장으로부터 이끌려 온 사람을 인계받은 뒤 바스켓에 태워 안전하게 올라가도록 유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무릎 부상에도 승객들을 무등 태워 올려
이날 우리가 선상에서 구조한 승객들은 거의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말을 잘 안 한다. 생존이 위협받는 공포에 빠지게 되어서 시야도 좁아지고 사물의 인식 능력도 떨어지며 신체의 반응속도도 늦어진다.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 대화를 하기 어렵다. 우리가 말을 걸어도 응답을 못하고 묵묵부답의 상태를 보인다.
그날도 그랬다. 헬기에서 내려진 바스켓에 사람이 눕거나 앉아 중심을 잡은 채 올려야 하는 데 이때 구조자는 바스켓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무엇보다 양 옆 테두리를 꽉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지시를 현장에서 즉석으로 전해줘야 하지만 겁을 집어 먹은 상태라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때마다 “바스켓 안전하게 잡으세요”라고 소리치면서 구조자의 손을 쥐어 바스켓 테두리를 꽉 잡게 해 주면 대개는 그 상태를 유지하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유일하게 한 남학생이 바스켓에 옮겨 타면서 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무척 놀랐다. 나중에 구조된 한 승객이 병원에서 언론과 인터뷰 중 자신이 구조대원에게 “배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다는 데 구조대원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본인은 그런 말을 했을지 몰라도 선상의 구조대원이라고 해봐야 몇 명 안 되는 데, 들었다는 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문제는 구조된 승객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 무조건 진실로 알려지고 정작 구조했던 대원들의 주장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로써 구조대원 모두가 죄인처럼 돼 버렸다. 임무를 수행하고 육지로 돌아 온 구조대원들은 이런 방송을 보면 마냥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 그날 선상 구조를 하면서 나하고 두 문장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승객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다시 김재현 경장과 내가 구조하던 선상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에는 金 경장이 손으로 잡아 끌어내면서 사람들을 나에게 인계했는 데 배가 점점 기울어지면서 金 경장의 손이 승객들과 닿지않게 된다. 통로였던 곳이 어느덧 긴 사각형의 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들여다보니 여전히 두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난간을 붙잡는 게 아니라 안간힘을 쓰며 철봉을 하는 자세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구조에 몰두하던 우리는 기울어진 선체 내부에서 어느 정도 기울어지는지 감이 없었다. 기울어지면 지는 대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 우물이 된 통로 속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끌어올리는데 문제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더 이상 사람들을 끌어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때 김 경장이 통로 속으로 미끄러지듯 뛰어 들어갔다. 그가 내려가면서 그의 무릎이 강철판과 부딪혔는데 다음날 金 경장은 목발을 집고 출근했다. 부상을 입은 것인데, 우리는 구조현장에서 부상을 입어도 내색을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데 길들여 진 사람들이었다. 임무에 집중하면 통증도 일단은 잊을 수 있다. 金 경장은 그 통로 속에서 자신이 어깨위로 사람들을 무등 태워 내 쪽으로 밀어 올렸다. 비로소 내가 손을 잡아 밖으로 끌어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여섯 일곱 사람쯤을 헬기로 올렸을 것이다.
구조 팀장이 본 ‘비극의 출발점’
이쯤에서 탄식이 나올 만큼 아쉬운 이야기를 해 보자. 만약, 우리가 투입될 당시에 배 안에 사람이 많다는 정보를 인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우리는 선박내부의 지휘체계가 붕괴되고 선장 이하 모든 선원들이 탈출하기 위해 조타실로 모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구조하기 바빴으니까. 상식적으로 우리 눈에는 승객들이 선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퇴선 명령을 받았으니까 구명조끼를 걸친 채 밖에서 난간을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선장도 도망가 버린 배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기울어져가는 배에 내린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틀림없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선실 내부에 들어가 빨리 탈출하라는 퇴선(退船) 메시지를 전하려 애썼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소수이고, 눈에 안 보이는 객실 내부에 수백 명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승객이 거의 전부인 줄 알았다. 누구도 내부에 그렇게 많은 승객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지 않았다. 창문을 왜 안 깼냐고들 한다. 우리 팀이 내려가 구조활동을 벌인 지역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외벽 난간과 갑판 지역이었다. 안방에 앉아 화면만 보고 현장을 논하면 답이 안 나온다.
알고보니 선실 내부의 수많은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은 방송에 의해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잘못된 정보에 오염돼 있었다. 그들은 헬기가 도착한 사실을 알고도 퇴선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움직이면 옆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릴 것이란 생각에 자중했을 것이다.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이타(利他)적인 사람들이 가장 잘못된 정보를 정직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희생된 것이다.
그 잘못된 정보로 인해 우리 구조대는 선실내부를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으로 오인(誤認)하게 만들었다. 실제는 숨바꼭질 하듯 꼭꼭 숨어 기척조차 없는 셈이 됐다. 현장에서 구조를 한 나로서는 비극의 출발점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장비도 인력도 부족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자. 해병대 부사관 출신인 나는 요즘 웬만한 특수부대라면 작전에 투입되는 대원들 간의 무선통신이 가능한 헤드셋 정도는 지급받는 줄 안다. 그런데 해경은 그런 장비가 태부족이다. 흔히 이번 사건을 두고 구조대원들의 훈련부족을 말하는 전문가란 사람들이 많은 데 교육과 훈련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그 나머지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이 장비다.
헬기에서 선체로 내린 이후부터 헬기와의 통신은 팔을 흔드는 수신호 말고 없는 우리에게는 기울어져가는 배위에서 그마저도 쉽지 않다. 경비정을 타건 헬기를 타건 작전현장에 투입되면 생명을 다투는 상황들이 여럿 발생한다. 대원간 긴밀한 통신이 아쉽지만 그런 장비조차 없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가 선상에 내렸을 즈음에 육지의 상황실은 승선 인원을 알고 헬기에 전달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배가 침몰해 구조대가 철수하던 10시 20분 이전에 선내에서 학생들이 카톡 문자를 날린 사실이 보도되고 있었다. 이 정보가 구조대원에게 전달할 방법은 없었을까. 그게 구조대와 해경의 잘못일까. 만약 헬기 기장이 이 정보를 얻었더라도 누군가 헬기에서 내려 우리에게 오기 전에는 그 내용을 전달해 줄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이처럼 필요한 장비임에도 미리 구비되지 못한 점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항공구조사의 인력과 대형헬기도 사실 부족한 형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4명의 항공구조사가 이 배치되지만 누구 하나 부상으로 입원하면 이번 팬더 512호의 권재준 경사처럼 단독 투입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팬더 헬기는 동력(動力)이 약해 해상 구조용으로 적합하지 않다. 더 많은 인원을 태우고 다닐 헬기가 필요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그런 요구를 할 입장도 못됐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 두 명의 구조사가 배에 올랐는데 언론은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때 왜 이런 걸 못했나. 그 때 왜 저런 걸 못했나… 우린 몸이 하나다.
“기다려! 그대로 있어라!”
통로에서 사람들을 다 올렸다고 판단한 김재현 경장이 밖으로 기어 올라왔다. 내가 타고 온 511호가 인근 서거차도로 옮겨 구조자들을 내리는 동안 제주 해경의 513호 헬기가 도착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항공 구조사 류규석 경장이 내 옆으로 하강해 5층 난간쪽의 김재현 경장에게 이동해 구조임무를 공동 수행했다. 그 순간 3층 선미쪽 통로에서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즉시 류규석, 김재현 두 구조사를 한 팀으로 만들고 3층 선미(船尾) 쪽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이 난간을 붙잡고 이동해서 끌어낸 승객들을 내가 맡았다.
그러는 사이 배의 기울기가 점점 더 심해졌다. 60도 가까이 기울어진 것이다. 뭔가 급하다는 느낌이 왔다. 나는 두 구조사가 있던 위치로 이동해 바스켓에 두 명씩 태워 올렸다. 원래는 1인용인데 급하니 두 사람을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1인용 바스켓에 두 사람을 태워 올리다 사고가 나면 나에게 따져 묻는 사람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구조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기울어진 배의 우측 최상부층 난간밖에 한 여학생이 난간을 붙잡은 채 앉아 있는 거였다. 소리쳤다.
“기다려! 기다려! 알았지?!”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저 쪽 승객들 다 올려주고 올테니까. 위험하니 기다려! 그대로 있어라!”
그 여학생이 내 말을 들었겠지만 겁에 질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여학생을 향해 두 주먹을 꽉 쥐는 흉내를 내면서 소리쳤다.
“꼭 붙잡고! 기다리고 있어라!”
저 만한 나이의 두 딸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당연히 이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글을 쓰니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때 내가 정말 내 딸들을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겹쳐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배는 더 기울고 있었다. 아까 본 여학생의 위치로 기어올랐다. 다행히도 정말 그 자리에서 난간을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참 고마웠다. 나는 헬기를 유도시켜 여학생을 태워 올려 보냈다. 그 직후 배는 90도로 기울어졌다. 배의 측면이 완전히 물위로 나온 것이다.
둘러보니 류 경장은 보이지 않고 김 경장 쪽에 5명의 승객들이 보였다. 그쪽으로 뛰어가서 512호 헬기의 바스켓으로 두 명을 올려 보냈다. 바로 그 순간. 배는 갑자기 100도, 110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회전중인 거대한 쇳덩어리 위에서 우리가 개미처럼 기어 다니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헬기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직접 태워야 했던 것이다. 512호기는 선체와 50cm 높이까지 하강했다. 착륙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구겨넣듯 실었다. 그리고 주변을 계속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계속 둘러보았다.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다가 헬기에 탑승중이던 정비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긴박하게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배가 침몰 중이니 빨리 타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순간 우리 뒤에는 아무도 없다고 판단하면서 나는 헬기로 뛰어 올랐다.
172명을 구조하고도 公共의 敵이 되다
헬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배는 아래로 쑥 가라앉았다. 선체 외부로 난 구멍을 통해 수압에 의한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헬기가 이륙 후에 방향을 잡은 곳은 가까운 서거차도(島) 였다. 그제서야 헬기 내부를 둘러보는 여유가 생겼다. 세어 보니 7인승 헬기에 모두 열 한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헬기 안에서 우리는 전원 구조한 것으로 알았다. 10시 20분이 조금 지났을 것으로 기억한다. 약 50분간 동안 구조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정도로 느껴졌다.
서거차도에는 보건소와 해경 출장소 그리고 헬기 패드장(착륙장)이 설치된 곳이다. 팬더 512호기가 패드장에 도착해 구조자들을 내려준 다음 다시 현장으로 날아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배는 형체를 감추고 선수 바닥만 물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낮게 선회하면서 표류자를 수색했다.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구조에 최선을 다했고 임무를 완수한 줄로만 알았다. 헬기는 급유(給油)를 위해 목포 항공대로 향했다.
항공대 주기장에서 급유 도중 정비사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언론보도 내용이었는데 300명이 넘는 승객을 전부 구조했다고 했다. 조금은 많게 느껴져 의아해 하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는 데 놀랍고 기뻤다. 다들 수고했다며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날 한 시간도 안 돼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배 안에 사람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200명이 넘는다고도 했다. 충격이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구조해냈는데 배 안에 그렇게나 많은 학생들이 남아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날 오후부터 언론과 방송은 해경을 적대시하며 보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고등학생인 두 딸이 사건에 대해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빠가 구조대원인데, 배 안의 자기 또래 학생들 수백 명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아직도 우리는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서로가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린다.
구조대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해 왔지만 이번 사건 만큼 구조대원들이 크게 이슈화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이번 사건 만큼 언론과 방송이 현장도 모르고 해경의 입장도 무시한 채 미확인 내용, 왜곡된 내용, 상상으로 만든 소설 등 무차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볼 때는 황당하지만,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듯하게 여기도록 만든 말과 글이 해경을 ‘公共의 敵’으로 몰아갔다. 그런 기사들이 두 달 가까이 인터넷을 꽉 채웠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반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울먹인 구조대원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나는 그동안 손석희라는 방송인을 참 좋아했다. 반듯하고 사려 깊게 말하는 태도에 깊은 호감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가 5월14일 종편 JTBC의 9시 뉴스에서 일부 헬기 조종사 및 구조대원이 “배 안에 승객들을 봤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죽을 것 같아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화면 상단엔 <해경, “죽을 것 같아서…”>란 표제를 몇 분 동안 계속 달고 있었고, 그 방송만 보면 해경과 항공 구조대는 그야말로 ‘죽일 놈들’이었다. 하루 밤이 지나는 동안 해당 방송 화면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헬기조종사와 구조대원들은 해당 방송사에 사과방송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우리는 법원에 호소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론날 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조차 잊고 말 것이다.
약 1년 전에 내가 좋아했던 손석희 앵커가 JTBC 사장으로 영입됐다는 기억이 났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가 JTBC 보도국 기자들을 만나 “균형·공정·품위·팩트를 4대 가치로 한 방송뉴스를 만들겠다”고 밝힌 말을 찾아냈다. 다시 읽어보니 이 말들이 나를 구역질나게 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그가 보도한 다이빙벨 사건을 포함해서 ‘해경이 죽을 것 같아서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까지 모조리 해경을 두들겨 패는 보도였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그가 취임하면서 밝힌 균형·공정·품위·팩트 등 4대 가치를 지킨 것은 없었다. 해경의 입장을 확인 보도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한쪽 입장만 전달해서 균형과 공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잠수 전문가들은 급류에서 다이빙벨이 무용지물이란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깡통 구조물을 들고 해경을 비난하던 구난(救難)업자를 동원해 세월호 구난 현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기까지 했다. 여기에 무슨 품위와 팩트가 있었나.
그날 우리는 해경 공보담당자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언론대응에 적잖이 실망스러워 했었다. 하긴 그들이라고 날고 기는 재주가 있을까. 인터넷으로 퍼져나간 악소문들이 성난 파도처럼 몰아쳐 대는 데 해경 출신 정치인 같은 방파제 하나 없이 권력 없는 맨몸으로 그걸 막아낼 재주는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은 많이 참담했다. ‘항공구조대원들이 죽기 싫어 배 안에 안 들어갔다더라’는 말이 항공구조대원들이 다 죽였다‘로 확산되고 있었다. 손석희 씨든 아니든 언론과 방송들은 다 똑같이 보였다. 우리보다 공부 더 많이 했고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일 텐데 말로는 객관적인 보도라고 하면서 남을 밟고 죽이는 데는 인정사정도 없었다. 부둣가의 뒷골목에서 마주하는 폭력배들의 난장질이나 서울의 언론과 방송이 휘두르는 폭력이나 다를 게 뭔가 싶었다. 폭력배들의 난장질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고 피하면 그만이지만, 한 번 쏟아내는 언론과 방송은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구조팀장으로서 그날 이후 내 임무 중 하나가 늘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대원들의 심기를 살피는 일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집단이다. 가족들도 아빠로써, 가장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빛내는 일을 제일로 치고 살아왔다. 대한민국의 바다를 내가 지킨다는 자부심과 자식으로서 내 아빠가 그런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나누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긍지를 갖고 살아왔다. 그런 긍지와 명예가 방송과 언론으로 박살나고 있었다.
분에 못이긴 한 대원이 울먹이면서 “팀장님,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했습니까?”라며 나에게 따졌다. “말조심해라”면서 다독거리는 내가 비겁하고 미웠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인 5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있었다. 청천벽력도 유분수라는데…
대통령이 우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날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구조 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말은 항공구조대 구조팀장인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목포해경 항공구조팀장인 내가 가장 먼저 내려가 가장 나중에 철수했다. 그런 내가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구조 활동을 펼치지 못해 희생이 크게 났다는 말 아닌가. 대통령의 말은 이어졌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
내가, 우리 구조팀이 구조에 실패했다는 대통령의 준엄한 판결문이 全 국민 앞에서 낭독될 줄이야. 꿈이라면 정말 두 번 다시 꾸기 싫은 악몽이었는데, 불행히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더 큰 충격파가 나를 때렸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 귀를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 대통령이 구조실패의 책임을 물으면서 우리 해경 전체를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내 직장의 상사들은 표현을 삼갔다. 다들 앞길을 더듬기에 바빴다. 오후부터는 해경을 해체하지만 인력 재배치의 수준으로 갈 것이란 예상들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들은 구조팀장인 나를 보면서 위로를 해야 할지 비난을 해야 할지 고심하는 표정이 되다가 그냥 옆으로 피해갔다. 이런 반응들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됐다. 할머니와 지내는 두 딸아이가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해도 사건과 관련해서는 한 마디도 안하려 했다. 아이들이 친구들로부터 이런 질문들을 들었을 것이다.
“너네 아빠 해경이라며?”
단순한 의문문이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해경의 구조실패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한 마당에 이 의문문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게 됐다.
“너네 아빠가 바로 그 문제의 해경이라며?”
“너네 아빠가 구조에 실패해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며?”
“너네 아빠 때문에 해경이 해체된다며?”
참, 세상이 모질다는 생각이 든다. 해병대 부사관을 거쳐 해경 특공대로 바다를 지킨다는 자부심 가진 남자가, 죽음직전으로 내 몰린 사람들을 무수히 구해오던 남자가, 불행히도 아내마저 병으로 먼저 보낸 뒤에, 내 삶의 터전이던 해경까지 내 앞에서 침몰하는 것 같다.
사람을 많이 구해주었지만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고맙다는 말을 그리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다른 직업보다는 많이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죄 안 짓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내 몸 돌보지 않고 뛰어들어 살려 왔다. 나와 같은 구조대원들 모두가 그러하다. 그런 우리의 해경 구조대원들은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난도질당했다.
도대체 말과 글로 물에 빠진 사람을 몇 명이나 살릴 수 있을까? 말과 글로 저 험한 바다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말과 글로 멀쩡한 해경을 박살냈다. 이번에 나는 처음으로 말과 글을 잘 하는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우리는 그들에 의해 대규모 구조실패의 원흉(元兇)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대통령은 그런 우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고. ●
■ 박훈식 경위가 보내온 구조 당시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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