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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화이트보스 2014. 7. 2. 12:33

한·일 관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중앙일보] 입력 2014.07.02 00:10 / 수정 2014.07.02 00:10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지난달 16일 부산시 중구 코모도호텔에서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한국 추진위원회 발족식’이 열렸다. 추진위원 말석에 이름이 오른 덕분에 당일치기로 부산에 다녀왔다. 부산문화재단을 중심으로 부산 지역 학계·문화계 인사들이 조선통신사 관련 행사를 한·일 공동으로 개최한 지는 꽤 된다. 유네스코 유산 등재만 해도 재작년 5월 공식 제안 후 양국 정부가 나서주기를 바라던 분위기였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공동 개최처럼 말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서 정부 차원 협력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결국 민간이 나섰다. 5월 21일 일본에서 추진회가 먼저 발족했고 이어 부산 발족식이 열린 것이다.

 의미는 크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분과위원장이기도 한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통신사 기록 등재에 대해 “지방(부산)이 나서서 중앙을 이끌고, 민간 주도로 정부를 움직인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고 평가했다. 양국 추진위원회는 학술회의, 등재 대상 목록 정리 등을 거쳐 2016년 3월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마침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다. 여느 나라 사이라면 기념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을 터. 그러나 한·일 관계는 괴괴한 침묵만 흐르고 있다. 침묵 이면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와 한국에 대한 염증(厭症)이 들끓고 있다. 일본의 일반 시민 사이에도 한국에 대해 ‘모오 이이(이제 그만 됐다)’ ‘도오데모 이이(어떻게 돼도 좋다)’의 기류가 강하다고 한다. 부산의 추진위원회 발족식 나흘 뒤 일본에선 고노담화(1993년) 검증 결과 보고서가 발표됐다. 한국은 보고서 내용은 물론 검증 작업 자체를 어이없어하는 분위기다. 발표 후 일본 정부 관계자가 검증 작업의 진정한 취지라며 전해 온 말은 이렇다. ‘일본 국내에서 많은 사람이 고노담화의 근거가 박약하다고 비판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그리고 한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도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담화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방어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한국인에게 그런 설명이 과연 먹혀들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21쪽에 이르는 보고서와 일본 외상·관방장관·관방부장관보, 검증팀 좌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종합하면 강제연행은 없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다 믿기는 어렵다, 문안은 한국과 협의해 만든 거다, 우리는 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등으로 성의를 보였는데 한국이 나중에 딴소리를 한다, 그래도 담화 수정은 안 하겠다, 앞으로 이런 점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겠다 등으로 요약된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단체가 기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일부 위안부 할머니의 실명을 언급하거나 “더러운 돈을 받지 말라” “받으면 매춘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괴롭혔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공식 문서에 이런 것까지 넣은 건 납득하기 어렵다”(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이미 한국 측 목소리에 귀를 닫은 듯하다. 내가 보기에 일본은 담화를 검증하면서 눈은 한국에, 귀는 미국에 초점을 고정한 듯하다. 어찌 됐든 위안부 문제를 겉모습으로나마 해결할 길은 더욱 멀어졌다. 자동차로 치면 범퍼 역할을 하던 한국 지한파와 일본 친한파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졌다.

 양국 간 감정의 골은 악화일로다. 눈을 과거로 되돌려 보자. 1598년 11월 일본과의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났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로 권력이 바뀌었다. 몇 차례 맛보기 사절 파견을 거쳐 조선은 1636년 다시 공식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왜란을 겪은 지 불과 38년이다. 본인 또는 부모 세대의 뼈저린 원한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사행길에 나선 통신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임진의 난리 그 누군들 분하지 않으리”(조엄), “우리 길 생각하니 괴루(愧淚·부끄러운 눈물)를 금할쏘냐”는, 피를 토하는 원통함이 지금까지 시문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는 만주에서 흥기한 후금(청)이 조선을 넘보던 때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조선반도를 덮쳤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국교 재개였던 것이다. 외교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해대기는 쉽다. 그런 관료·정치인일수록 뒷감당할 때는 꽁무니를 뺀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다. “군중의 맨 앞에 서서 ‘저기에 적이 있다’고 외치는 그 자가 바로 적이다”라고. 오늘 일본 정부가 각의에서 집단자위권 행사 방침을 공식 의결했고, 한편으로 베이징에서 북한과 국장급 회의를 열었고, 내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국빈으로 우리나라에 온다. 한국 외교는 임란 직후 못지않은 시험대에 올라 있지 않은가.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