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
1974년 8월 15일 현직 대통령 부인으로 북한의 흉탄에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지 올해로 만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그 분의 고결한 생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육 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나 말을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일이 없다. 육 여사는 진정 어떤 분이었나?" 나는 내가 겪은 사소한 일들을 통해 인간 육영수의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서투른 솜씨로나마 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필자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1974년 8월 15일 현직 대통령 부인으로 북한의 흉탄에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지 올해로 만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그 분의 고결한 생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육 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나 말을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일이 없다. 육 여사는 진정 어떤 분이었나?" 나는 내가 겪은 사소한 일들을 통해 인간 육영수의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서투른 솜씨로나마 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필자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 웃고 있는 육영수 여사.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조그만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사연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받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많이 도와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최신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집을 겨우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건넨 후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막 같은 집에는 전깃불도 없이 희미한 촛불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 천막촌을 찾은 육영수 여사.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밥이 아니라 들판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메어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저 할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나는 가지고 간 돈과 쌀을 전해주고는 아무 말도 더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이야기를 했다. 내외분은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길에 야멸차리만큼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결심을.
-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서독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가 파독광부를 만나기 위해 함보른 탄광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국가기록원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가난뱅이 나라의 대통령 내외가 그들을 눈물 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70년대 초 성남에서 만난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 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날 밤 내가 만난 올망졸망한 꼬맹이들은 지금은 50대를 바라볼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