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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떨던 祖國에, 옷 입혀주고 떠나다

화이트보스 2014. 11. 10. 14:25

가난에 떨던 祖國에, 옷 입혀주고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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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4.11.10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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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섬유산업의 代父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한강의 기적' 이끈 1세대 - "따뜻한 옷 만드는 일도 愛國"
    국내 첫 나일론 공장 세우고 스포츠 지원 등 사회공헌 앞장

    평생 소탈한 삶 - 평소 칼국수·된장찌개 즐겨… 50년 된 슬리퍼 버리자 호통
    은퇴 후엔 그림 그리기 전념… 고희·팔순·米壽 전시회 열어

    한국 섬유산업을 개척한 이동찬(李東燦)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8일 오후 4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 명예회장은 코오롱그룹을 '섬유 종가(宗家)'로 키우며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이끈 1세대 경영인이다. "인간 생활의 풍요와 인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지론으로 국민 의(衣)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22년 경북 영일군 신광면(현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15세 때 도일(渡日), 오사카 흥국상업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晝耕夜讀)했다.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2년을 수료한 뒤 부친인 고(故)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를 도와 사업에 뛰어들었다. 광복 후 귀국해 "피폐한 조국 경제를 일으키고 헐벗은 국민들이 따뜻한 옷을 입게 하는 일도 애국(愛國)"이라며 직물 공장을 차렸다.

    이동찬 명예회장이 2001년 서울 통의동의 개인 화실(畵室)에서 찍은 사진. 이 명예회장은 당시 팔순 기념 전시회인 ‘자오(自娛)의 그림전’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동찬 명예회장이 2001년 서울 통의동의 개인 화실(畵室)에서 찍은 사진. 이 명예회장은 당시 팔순 기념 전시회인 ‘자오(自娛)의 그림전’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코오롱 제공

    1957년 4월 2일, 이 명예회장은 부친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했다. 국내 최초로 나일론 공장도 건설했다. 코오롱(KOLON)이라는 사명(社名)이 여기서 나왔다. 1977년 코오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 명예회장은 연구·개발(R&D)과 기술 혁신에 매진해 1980년대에는 필름·산업자재로, 1990년대에는 초극세사를 이용한 첨단 섬유 제품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95년 말 장남인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이 됐다.

    이 명예회장은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근로자의 생활 터전이자 사회적 공기업"이라며 '재계의 어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재계 회장들이 기피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4년간이나 맡으며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대에 노사(勞使)와 공익대표가 참여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1990년)하고 이어 노사의 산업평화선언(1994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 국가 경제에 기여한 공로로 1992년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기업인 최초로 받았다.

    ①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1978년 울산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②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봉주 선수 등 코오롱 마라톤 선수단을 격려하고 있다. ③1997년 김창성(오른쪽) 후임 경총 회장으로부터 14년 재직 공로패를 받고 있다
    ①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1978년 울산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②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봉주 선수 등 코오롱 마라톤 선수단을 격려하고 있다. ③1997년 김창성(오른쪽) 후임 경총 회장으로부터 14년 재직 공로패를 받고 있다. /코오롱 제공
    이 명예회장은 대한농구·골프협회장, 2002 월드컵대회조직위 초대 위원장을 지내며 스포츠 발전에 힘썼다. 특히 이 명예회장은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는 마라톤식 경영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고 말할 정도로 마라톤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코오롱 마라톤팀을 창설하고 신기록 포상금(1억5000만원)을 내걸며 비(非)인기 종목이었던 마라톤을 육성해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밑거름이 됐다.

    이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오운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을 펼치는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벌였다. 2001년 자신의 호를 딴 '우정(牛汀) 선행상'을 만들고 선행·미담 사례를 발굴해 매년 직접 시상했다.

    이 명예회장은 된장찌개와 칼국수를 즐기는 소탈한 경영자였다. 50년 신은 낡은 슬리퍼를 치우고 새것을 갖다놓은 비서진에게 "멀쩡한 것을 왜 버리느냐"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림 그리기에 전념해 고희(古稀)·팔순·미수(米壽) 기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유족은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등 1남 5녀. 코오롱그룹장(葬)으로 발인은 12일 오전 5시다. 고인은 부인 신덕진 여사가 묻힌 경북 김천시 봉산면 금릉공원묘원에서 영면(永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