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총리·본사 고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선 큰 고비들이 있기 마련이다. 1990년 독일통일로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은 그 이상의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 해체라는 획기적 결정과 동서 유럽의 협력관계 추진은 냉전은 물론 전체주의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더해 세계사의 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덩샤오핑의 시장경제를 통한 중국의 발전이었다. 시장경제의 세계화란 역사의 추세에 동승하겠다는 그의 선택은 공산당 통치와 전체주의 독재를 자동적으로 연계시켰던 관행을 바꾸어야 할 새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은 더 이상 유일지도체제가 아니며 외부로부터 차단된 폐쇄사회나 경제가 아닌 새 실험을 진행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 결과로 20세기 말의 국제질서는 새로운 개혁과 개편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듯 강대국들의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국가들의 동맹관계나 공동체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 새 국제질서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변화 추세다. 독일·프랑스·영국이란 개별 국가의 영향력보다는 28개 회원국이 모인 유럽연합의 국제적 위상이 훨씬 더 큰 힘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선 중국과 일본이란 제2, 제3의 경제대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있음으로 말미암아 개별 국가나 지역 차원에서의 국제적 영향력이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는 이른바 아시아패러독스에 빠져들었다고 진단된다. 그러기에 아직도 분단 70년의 고통을 안고 있는 한국이 오히려 이웃 대국인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동양평화를 위한 아시아공동체 발전에 보다 새롭고 진취적인 기여가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정상급 경제대국이 된 중국이 신대국관계의 조성을 미국에 제의한 것은 적절하다 하겠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미래는 대국관계에 못지않게 지역공동체, 즉 이웃 관계의 순조로운 발전에 달려 있음을 중국도 유의해야 될 것이다.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 3국 관계가 순기능적으로 함께 진전될 때 중화(中華)의 꿈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긍정적 방향으로의 진전에 당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핵 문제, 나아가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 해결에 대한 중국의 보다 적극적 공헌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가장 큰 악연을 풀지 못하고 있는 사이다. 70년 전 히로시마 원폭의 사상자 15만 명 가운데 2만여 명은 한국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일본이나 6·25전쟁을 경험한 한국처럼 모든 국민이 평화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이웃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일본 언론인이 바랐던 대로 일본은 전환하는 국제질서에서 강력한 장타자보다는 타율 높은 2번 타자가 되어, 특유의 근면성과 창의성으로 평화롭게 번영하는 아시아공동체 건설에 앞장설 것이라 믿는다. 역사의 족쇄를 벗어버리는 일본 국민의 용기가 새로운 아시아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라는 가벼운 흥분이 우리 이웃에서 느껴졌다. 새해에는 한·중·일이 함께 앞장서는 아시아공동체 건설의 궤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한국인에게는 100년의 꿈이라고 하겠다. 3·1독립선언서의 구절대로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 문제리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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