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위중하니 기준금리를 1%포인트를 내렸으면 좋겠다.”(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관례대로 0.25%포인트 인하할 것이다.”(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기재부장관은 금융통화위원회 결정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갖고 있다.”(강만수 장관)
“0.5%포인트까지는 생각해 보겠다. 더 이상은 절대 안된다.”(이성태 총재)
“내 판단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요.”(강만수 장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0월 26일 저녁. 당시 강만수 기재부 장관과 이성태 한은 총재의 전화 통화는 이렇게 끊겼다. 그날 오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려 다음날인 27일 한은이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금리를 인하키로 결정했지만, 두 사람은 기준금리 인하 폭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총재는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임시 금통위에서 강 장관의 요구를 반영해 사상 최대 폭인 0.75%를 인하, 금리를 2006년 수준인 4.25%로 낮췄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일화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출간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이라는 책에 실렸다. 그는 “당시 한은이 금리를 크게 낮추자 당시 언론들은 '한국은행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더라”면서 “위기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교환) 성사, 법인세 감세(減稅) 정책 등의 막전막후를 공개했다. 그가 2005년 출간한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30년'의 속편격이다. 책 말미에 ‘1997 경제위기의 원인·대응·결과’라는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와 ‘위기를 넘어 일류국가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대응 전략과 앞으로의 길’라는 2011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실었다. 책이 출간되기 앞서 강 전 장관과 지난달 29일 2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회고록이 아니라 실전 경제학 실록이다
그는 책에서 “나는 관료이고 현장인이다. 비판과 분석을 당하는 입장에서 자전적인 회고보다 사실적인 실록으로 실전경제학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차관으로서 외환위기와 싸웠고, 장관으로서 글로벌 금융위기와 싸웠다. 두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경상수지가 나쁘면 병든 경제라는 것을 절감했다. 환율은 주권의 문제고, 경상수지 흑자는 우리 경제의 생명선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썼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실세 장관이었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렇게 평가했다. “2007년에는 정권을 탈환하는데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천성산 습지에는 도롱뇽이 더 많아졌다는데···갈등과 분열을 막아야 한다
그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낙관과 비관이 겹친다고 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갈등을 증폭하는 사회라고 했다. 그는 “‘희망버스’가 찾아가는 파업 현장은 전투적이고, ‘천성산 도롱뇽’과 ‘4대강 사업 반대’가 보여준 환경운동은 파괴적이다. 자기들이 결정한 군사 항구 건설을 자기들이 반대하는 ‘강정마을’은 대의정치를 무너뜨렸다. 문창극 총리 후보가 청문회도 하기 전에 사퇴시킨 언론과 정치는 과정을 무시했다. 지금 천성산 습지에는 도롱뇽이 더 많아졌다는데 엄청난 국고 낭비를 초래한 도롱뇽 스님 어디 가셨나?”라고 썼다.
그는 갈등과 질투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학자 다케우치(Takeuchi Yaso)의 '정의와 질투의 경제학' 일부를 책에 인용했다. “질투는 때때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10억엔을 번 부자에게 9억엔의 세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왜곡된 정의는 질투의 산물이고, 질투의 산물은 능력 있는 사람과 경제 활력의 해외 유출을 초래하고 결국 남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는 갈등을 풀어내지 못하고 증오를 쌓아가는 상황을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했다. “데모를 막던 경찰이 하이힐에 맞아 피를 흘리는 문명국이 어디에 있을까? 데모대의 죽창에 군인들이 도망가는 현장에 나타난 어떤 총리가 쌍방이 조금씩 물러나라고 한 것은 국가와 법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사건이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던지고 도끼로 문을 부수는 국회의원에 대해 자율적인 처리를 못하는 국회가 어떻게 법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썼다.
◇이광재,김종률 등 당시 야당 의원들 고맙고, 정운찬 교수는 감세 비난하고 총리되자 애매하게 말해
책은 정치인, 관료 등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공과를 평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박하지 않다. 그는 “2008년 연말 감세 등 17개 세법을 통과시키는데 야당의 이광재 의원과 김종률 의원이 대승적인 타협을 해준 것을 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총리였던 권오규 부총리가 당시 재무장관회의에 불과했던 G20(주요 20개국)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 때 G20라는 개념을 머리 속에 넣어둘 수 있었다”고 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 대해서는 비난에 가까운 글을 썼다. “정운찬 교수는 (내가 추진했던) 감세 정책에 대해 ‘감세가 실제 경제효과 없이 소수 부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석학이라는 사람의 과격한 비판이었다. 뒤에 이명박 정부 총리가 된 그는 국회에서 ‘감세에 대해서는 적극적 찬성을 못하지만, 경제 상황에 따라서는 쓸 수도 있지 않나 싶다‘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총리가 된 뒤에도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부자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더 이상의 감세는 안 된다고 국회와 국무위원들에게 말했다”면서 “국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론적으로 경기 조절 차원에서 증세나 감세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수는 있다”고 했다. 강 전 장관은 또 “금융위기 당시 어떤 교수는 나를 비판하고, ‘미네르바’가 국민 스승이라고 치켜세웠다”고 비판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노무현 정부의 대못‘을 뽑았다고 표현하면서 당시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까지 제 역할을 못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종부세는 정치 폭력이다. 종부세를 없애려고 하는데 야당은 무책임했고, 여당은 비겁했다. 논란을 피하려는 청와대 비서진은 안일했다. 나는 청와대 회의에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까지 말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것은 관료의 숙명
그는 지난 2008년 기재부장관 시절 숱한 비판을 받았다. 스스로 “지난 43년의 공직 생활은 비판과 비난의 범벅이었지만, 그것이 관료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는 개발도상국가의 관료로 경제적으로 풍족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힘들었다고 했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1970년 11월 누런 월급봉투의 2만3544원(당시 환율로 74.74달러)이 고뇌의 단초가 되었다. 하숙비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자식 노릇도 할 수 없는 공직을 접을까도 생각했다. 대구로 서울로 뉴욕으로 흘러 흘러 43년을 버티었다”고 썼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내외, 여야에서 쏟아졌던 비판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그랬지만, 2008년에 외국 언론들은 ‘1997년 위기로 회귀’,‘남아프리카와 헝가리 다음 위험도가 높은 나라’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2009년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빨리 회복세를 보이자 태도를 바꾸더라. ‘한국은 370억달러의 경기부양책에 의하여 침체를 피하고 시장을 놀라게 했다’(2009년 4월24일,CNN), ‘서울 관료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보낸다’(2009년 7월27일 블룸버그)는 찬사를 보내더라.”
그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미 통화 스와프 성사 등 관료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나는 발이 넓고 원만하고 타협을 잘하는 관료를 싫어했다. 무능한 관료는 때로 실수를 하지만 가르치면 잘할 수 있다. 적당히 주어진 일만 하는 관료가 무능한 관료보다 더 문제다. 관료가 깨어 있어야 다수결 민주주의의 대중영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경제 관료들에 대한 믿음을 책 곳곳에서 표현했다. “일류국가 건설의 중추적인 역할은 관료에게 있다. 관료가 깨어 있어야 다수결 민주주의의 대중영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비판을 무릅쓰고 내일을 위하여 관료들이 일할 때 밝은 내일이 있고 일류국가를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비판과 비난의 범벅이었다’고 한 43년의 공직 생활 동안 세 번의 사표를 썼다고 했다. “세 번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다. 첫 번째는 1997년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책임으로 담당과장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고, 두 번째는 1997년 외환위기 대응에 대한 책임으로 차관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고, 세 번째는 2008년 글로벌경제위기에 대응한 환율정책과 감세정책의 책임으로 장관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글로벌경제위기 당시 장관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비판과 함께 퇴진압력을 받았던 세 번째 사표는 ‘서울 관료에게 경의를’, ‘교과서적 사례’라는 (외신의)평가로 결론지어졌다. 결과적으로 공의가 밝혀졌지만 나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것이 관료의 숙명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장관에서 물러난 어느 날 옛날 재무부 시절 자주 드나들던 피맛골 막걸리집 ‘열차집’에 갔다. 벽에 붙어 있는 낙서장에 “만수 수구 또라이 기득권 부자 그만 챙겨라”는 글이 있었다. (언론은)올드보이, 킹만수, 강고집, 경제대통령으로 수없이 비아냥거렸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스스로 고집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옳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옳고, 해야 할 일은 아무리 어렵고 누가 뭐래도 했다.‘강고집’이라는 별명은 싫어했으나 따라다녔다”고 했다.
◇주인집 요강 비우던 입주 과외 학생이 기획재정부 장관이 됐다
인터뷰를 하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숙명이라면서 관료는 왜 됐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려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기회가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경남고 다닐 때 입주 과외를 해서 겨우 학교를 다녔다. 어떤 집에서는 종처럼 지냈다. 아침에 주인집 안방 요강부터 비우고, 집 안팎 빗자루질까지 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 이 땅을 떠나고 싶었다. 요새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유명한데, 파독 광부들 얘기가 나오다더라. 나도 독일에 가려고 했다. 고3 때 육군사관학교에 원서를 낸 적이 있다. 1학년떄 독일어 시험을 봐서 1등을 하면 독일 육사로 유학을 갈 수 있다고 해서 그랬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외환은행에 원서를 낸 적도 있다. 당시 브라질 이민이 늘어나면서 상파울루지점을 낸다고 해서 거기 가려고 했다. 그 때마다 고교 시절 은사께서 나를 잡았다. 가난한 나라, 힘없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 법대에 입학했지만, 판검사가 되지 않고 재무부에 들어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했다.
“관례대로 0.25%포인트 인하할 것이다.”(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기재부장관은 금융통화위원회 결정에 대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갖고 있다.”(강만수 장관)
“0.5%포인트까지는 생각해 보겠다. 더 이상은 절대 안된다.”(이성태 총재)
“내 판단대로 하는 것이 좋을 거요.”(강만수 장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0월 26일 저녁. 당시 강만수 기재부 장관과 이성태 한은 총재의 전화 통화는 이렇게 끊겼다. 그날 오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려 다음날인 27일 한은이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금리를 인하키로 결정했지만, 두 사람은 기준금리 인하 폭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총재는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임시 금통위에서 강 장관의 요구를 반영해 사상 최대 폭인 0.75%를 인하, 금리를 2006년 수준인 4.25%로 낮췄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일화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출간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이라는 책에 실렸다. 그는 “당시 한은이 금리를 크게 낮추자 당시 언론들은 '한국은행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더라”면서 “위기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교환) 성사, 법인세 감세(減稅) 정책 등의 막전막후를 공개했다. 그가 2005년 출간한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30년'의 속편격이다. 책 말미에 ‘1997 경제위기의 원인·대응·결과’라는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와 ‘위기를 넘어 일류국가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대응 전략과 앞으로의 길’라는 2011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실었다. 책이 출간되기 앞서 강 전 장관과 지난달 29일 2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회고록이 아니라 실전 경제학 실록이다
그는 책에서 “나는 관료이고 현장인이다. 비판과 분석을 당하는 입장에서 자전적인 회고보다 사실적인 실록으로 실전경제학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차관으로서 외환위기와 싸웠고, 장관으로서 글로벌 금융위기와 싸웠다. 두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경상수지가 나쁘면 병든 경제라는 것을 절감했다. 환율은 주권의 문제고, 경상수지 흑자는 우리 경제의 생명선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썼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실세 장관이었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렇게 평가했다. “2007년에는 정권을 탈환하는데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천성산 습지에는 도롱뇽이 더 많아졌다는데···갈등과 분열을 막아야 한다
그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낙관과 비관이 겹친다고 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갈등을 증폭하는 사회라고 했다. 그는 “‘희망버스’가 찾아가는 파업 현장은 전투적이고, ‘천성산 도롱뇽’과 ‘4대강 사업 반대’가 보여준 환경운동은 파괴적이다. 자기들이 결정한 군사 항구 건설을 자기들이 반대하는 ‘강정마을’은 대의정치를 무너뜨렸다. 문창극 총리 후보가 청문회도 하기 전에 사퇴시킨 언론과 정치는 과정을 무시했다. 지금 천성산 습지에는 도롱뇽이 더 많아졌다는데 엄청난 국고 낭비를 초래한 도롱뇽 스님 어디 가셨나?”라고 썼다.
그는 갈등과 질투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학자 다케우치(Takeuchi Yaso)의 '정의와 질투의 경제학' 일부를 책에 인용했다. “질투는 때때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10억엔을 번 부자에게 9억엔의 세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왜곡된 정의는 질투의 산물이고, 질투의 산물은 능력 있는 사람과 경제 활력의 해외 유출을 초래하고 결국 남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는 갈등을 풀어내지 못하고 증오를 쌓아가는 상황을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했다. “데모를 막던 경찰이 하이힐에 맞아 피를 흘리는 문명국이 어디에 있을까? 데모대의 죽창에 군인들이 도망가는 현장에 나타난 어떤 총리가 쌍방이 조금씩 물러나라고 한 것은 국가와 법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중대한 사건이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던지고 도끼로 문을 부수는 국회의원에 대해 자율적인 처리를 못하는 국회가 어떻게 법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썼다.
◇이광재,김종률 등 당시 야당 의원들 고맙고, 정운찬 교수는 감세 비난하고 총리되자 애매하게 말해
책은 정치인, 관료 등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공과를 평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박하지 않다. 그는 “2008년 연말 감세 등 17개 세법을 통과시키는데 야당의 이광재 의원과 김종률 의원이 대승적인 타협을 해준 것을 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총리였던 권오규 부총리가 당시 재무장관회의에 불과했던 G20(주요 20개국)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 때 G20라는 개념을 머리 속에 넣어둘 수 있었다”고 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 대해서는 비난에 가까운 글을 썼다. “정운찬 교수는 (내가 추진했던) 감세 정책에 대해 ‘감세가 실제 경제효과 없이 소수 부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석학이라는 사람의 과격한 비판이었다. 뒤에 이명박 정부 총리가 된 그는 국회에서 ‘감세에 대해서는 적극적 찬성을 못하지만, 경제 상황에 따라서는 쓸 수도 있지 않나 싶다‘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총리가 된 뒤에도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부자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더 이상의 감세는 안 된다고 국회와 국무위원들에게 말했다”면서 “국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론적으로 경기 조절 차원에서 증세나 감세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수는 있다”고 했다. 강 전 장관은 또 “금융위기 당시 어떤 교수는 나를 비판하고, ‘미네르바’가 국민 스승이라고 치켜세웠다”고 비판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김태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노무현 정부의 대못‘을 뽑았다고 표현하면서 당시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까지 제 역할을 못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종부세는 정치 폭력이다. 종부세를 없애려고 하는데 야당은 무책임했고, 여당은 비겁했다. 논란을 피하려는 청와대 비서진은 안일했다. 나는 청와대 회의에서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까지 말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것은 관료의 숙명
그는 지난 2008년 기재부장관 시절 숱한 비판을 받았다. 스스로 “지난 43년의 공직 생활은 비판과 비난의 범벅이었지만, 그것이 관료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는 개발도상국가의 관료로 경제적으로 풍족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힘들었다고 했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1970년 11월 누런 월급봉투의 2만3544원(당시 환율로 74.74달러)이 고뇌의 단초가 되었다. 하숙비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자식 노릇도 할 수 없는 공직을 접을까도 생각했다. 대구로 서울로 뉴욕으로 흘러 흘러 43년을 버티었다”고 썼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내외, 여야에서 쏟아졌던 비판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그랬지만, 2008년에 외국 언론들은 ‘1997년 위기로 회귀’,‘남아프리카와 헝가리 다음 위험도가 높은 나라’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2009년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빨리 회복세를 보이자 태도를 바꾸더라. ‘한국은 370억달러의 경기부양책에 의하여 침체를 피하고 시장을 놀라게 했다’(2009년 4월24일,CNN), ‘서울 관료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보낸다’(2009년 7월27일 블룸버그)는 찬사를 보내더라.”
그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미 통화 스와프 성사 등 관료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나는 발이 넓고 원만하고 타협을 잘하는 관료를 싫어했다. 무능한 관료는 때로 실수를 하지만 가르치면 잘할 수 있다. 적당히 주어진 일만 하는 관료가 무능한 관료보다 더 문제다. 관료가 깨어 있어야 다수결 민주주의의 대중영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경제 관료들에 대한 믿음을 책 곳곳에서 표현했다. “일류국가 건설의 중추적인 역할은 관료에게 있다. 관료가 깨어 있어야 다수결 민주주의의 대중영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비판을 무릅쓰고 내일을 위하여 관료들이 일할 때 밝은 내일이 있고 일류국가를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비판과 비난의 범벅이었다’고 한 43년의 공직 생활 동안 세 번의 사표를 썼다고 했다. “세 번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다. 첫 번째는 1997년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책임으로 담당과장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고, 두 번째는 1997년 외환위기 대응에 대한 책임으로 차관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고, 세 번째는 2008년 글로벌경제위기에 대응한 환율정책과 감세정책의 책임으로 장관이었던 나는 사표를 써야 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글로벌경제위기 당시 장관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비판과 함께 퇴진압력을 받았던 세 번째 사표는 ‘서울 관료에게 경의를’, ‘교과서적 사례’라는 (외신의)평가로 결론지어졌다. 결과적으로 공의가 밝혀졌지만 나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것이 관료의 숙명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장관에서 물러난 어느 날 옛날 재무부 시절 자주 드나들던 피맛골 막걸리집 ‘열차집’에 갔다. 벽에 붙어 있는 낙서장에 “만수 수구 또라이 기득권 부자 그만 챙겨라”는 글이 있었다. (언론은)올드보이, 킹만수, 강고집, 경제대통령으로 수없이 비아냥거렸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스스로 고집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옳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옳고, 해야 할 일은 아무리 어렵고 누가 뭐래도 했다.‘강고집’이라는 별명은 싫어했으나 따라다녔다”고 했다.
◇주인집 요강 비우던 입주 과외 학생이 기획재정부 장관이 됐다
인터뷰를 하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숙명이라면서 관료는 왜 됐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려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기회가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경남고 다닐 때 입주 과외를 해서 겨우 학교를 다녔다. 어떤 집에서는 종처럼 지냈다. 아침에 주인집 안방 요강부터 비우고, 집 안팎 빗자루질까지 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 이 땅을 떠나고 싶었다. 요새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유명한데, 파독 광부들 얘기가 나오다더라. 나도 독일에 가려고 했다. 고3 때 육군사관학교에 원서를 낸 적이 있다. 1학년떄 독일어 시험을 봐서 1등을 하면 독일 육사로 유학을 갈 수 있다고 해서 그랬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외환은행에 원서를 낸 적도 있다. 당시 브라질 이민이 늘어나면서 상파울루지점을 낸다고 해서 거기 가려고 했다. 그 때마다 고교 시절 은사께서 나를 잡았다. 가난한 나라, 힘없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 법대에 입학했지만, 판검사가 되지 않고 재무부에 들어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