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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애 낳고 직장에서 허덕대다 허송세월한 몇 년 사이 그 아이는 박사학위뿐 아니라 미국 교수직까지 가지고 나타났다. 귀국 환영의 자리에서 마주친 그 아이의 눈빛은 익숙했다. 이십 년 전쯤 내가 그 친구에게 던진 바로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으니. 40대에 벌써 노후 걱정 연금 계산에 퇴직 후 필요한 최소 생활비를 이야기하며 한숨을 내쉬는 데 그 친구는 65세가 정년이며 종신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 변신을 축하하지만 내 마음이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남편이 대기업 임원이 되었다며 한턱 내겠다고 부르는 친구의 전화도 나를 슬프게 한다. 대학원이라도 가는 동창은 그래도 좀 낫지. 멀쩡하게 명문대를 나와서 조신한 현모양처가 되겠다며 일찌감치 청첩장을 돌리던 그때. 나는 또 비슷한 눈빛을 던졌으리라. 나는 결코 그 아이가 들고 나온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과 명품 구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남편의 억대 연봉이 절대 부럽지 않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신고 나온 내 하이힐의 굽은 보도블록 틈에 끼어 가죽이 까인 채 너덜너덜하고 친구의 윤기나는 캐시미어 코트와 보푸라기가 대롱대롱 매달린 내 코트는 어찌 그리 비교가 되는지. “그래도 너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재주가 많더니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친구의 말은 백 퍼센트 진심으로만 꼭꼭 채워져 있는 말이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만이 지독한 슬픔의 우물에서 나를 단단히 지탱하게 해주는 동아줄이다.
아이의 같은 반 학부형 모임을 나가서 우리 반의 우등생 엄마를 만났을 때 나는 또 슬퍼진다. “아휴 또 1등을 했어요? OO이는 정말 천재인가 봐요” 맘에도 없는 축하인사를 날리지만 속은 급성 위장병이라도 걸린 것 마냥 마구 쓰려온다. 한 때 아이가 어렸을 때 나도 저런 소리 많이 들어보지 않았던가. 왜 아이들은 어릴 때만 천재여서 부모들을 좌절시키는가. 아무리 아들과 같이 밤을 새면서 시험 공부를 했어도 도저히 그 아이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달아야 할 때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왜 그렇게 재주가 많은지. 누구는 디베이트 대회를 나가 상을 받았다고 누구는 음악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왔단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 것같은 쓰린 속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데 기껏 칭찬이라고 날아오는 말이 마지막 KO를 위한 카운터 펀치 같기만 하다. “XX이는 어째 그리 성격이 좋아요. 맨날 애들한테 먹을 거 사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해준다네요.” 왜 대학에는 성격 특별 전형은 없는 거냐.
터덜 터덜 진이 빠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바람에 뒹구는 낙엽 몇 개와 그 속에 말라붙어 죽은 딱정벌레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생각해보니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동물원에 갇힌 호랑이의 불안 초조”라는 안톤 슈낙의 글을 보면서 애써 슬픈 표정을 지었던 그 순진했던 시절도 있었다. 한 편의 시, 한 곡의 노래와 영화, 그리고 낙엽과 햇빛이 나를 진짜로 슬프게 했던 그때. 그러니 돌이켜 보면 친구의 출세와 부유함. 자식자랑 같은 것 따위로나 슬퍼하고 있는 나 자신의 한심함. 그것이야말로 나를 진짜로 슬프게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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