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뜻은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이다"
영광지역 동학교세 커, 1주일 거리 보은집회에 100명 참가 농민군 영광진격 전 법성포 이향(吏鄕)에 통문, 폐정 촉구 가혹한 세금과 日상인 결탁 폭리 등 중단하고 개혁 동참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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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법성포 모습동짓재에서 바라본 법성포의 전경. 동짓재는 법성 동쪽에 있는 고개다. 동짓재는 과거 법성포로 들어오는 유일한 육로였다. 멀리 보이는 것이 뒷뫼산(일제시대때 인의산으로 이름지어짐)이다. 1895년 이전에는 그 아래쪽 바다에 독암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중간쯤 언덕에 있는 초가마을은 상리로 과거에 법성진 관아가 있던 곳이다. 오른쪽 마을이 옵박구미(오빡구미, 옻밭굼)마을이다. |
△영광지역 동학전파 역사
영광에는 1880년대 말이나 1890년대 초에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란기록>취어(聚語)에 보면 ‘1893년 음력 3월27일 아침에 호남의 영광등지에서 100여 인이 도착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충청도 보은집회에 영광의 동학교도 100명이 참가했다는 것은 이미 영광에 상당수의 동학교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당시 영광에서 보은까지는 영광~무장~흥덕~고부~삼례~고산~금산~청산~보은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했는데 1주일 정도는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이런 장거리 길을 마다않고 영광에서만 100명이 보은집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수가 보은집회에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전남 서해안 일대 영광과 함평, 무안은 유독 동학교인이 많았고 그만큼 세가 강했다.
영광지역의 동학조직은 1893년 보은취회 당시부터 이미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당 무장 대접주 손화중의 관할지역으로 동부면 출신 양경수(梁京洙) · 홍농면 출신 송문수(宋文洙)와 오태숙(吳泰淑) · 도내면 고성리 출신 서우순(徐佑順)을 비롯하여 최준숙(崔俊淑) · 박인지(朴仁之)등 유명한 지도자들이 많았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2차 9월 봉기 지도자 중에서 영광 출신으로 오하영(吳河泳)과 오시영(吳時泳), 최시철(崔時澈), 오정운(吳正運), 최재형(崔載衡)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1894년 1월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고부를 점령했다.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장흥 벽사 역졸들을 끌고 와 고부를 쑥대밭을 만들자 3월 13일쯤 무장 당산으로 몸을 피신했다.
전봉준은 대접주 손화중의 협력을 얻어 3월 21일 4천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무장에서 봉기했다. 무장기포는 동학농민군의 항쟁이 전국단위의 혁명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이때 무장기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호응했던 지역이 바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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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지역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정택근씨. 정씨는 국사편찬위원회사료위원으로 지역역사와 문화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다. |
영광은 동학농민혁명 1차 기포가 일어난 무장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손화중의 영향권에 있었기에 상당수 동학교도들이 무장기포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지리적 요인과 함께 영광지역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그 어느 지역보다 심했다는 점도 영광이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배후지가 된 원인이다.
손화중은 무장 일대의 대접주로서 인근의 정읍과 고창, 흥덕, 영광, 장성, 나주, 함평, 광주 일대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장기포 이후 영광과 함평, 무안일대 동학교도들이 대거 관군과의 싸움에 뛰어든 것은 전봉준을 적극 지원하라는 손화중의 지시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군기록에 따르면 농민군들은 각 고을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제작해 행군할 때 이를 휘날렸는데 부안과 고부, 영광, 무장, 흥덕, 고창 등의 지명이 적힌 깃발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3월25일 백산에서 결성된 연합부대에는 전북지역 농민군과 전남지역 농민군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군은 4월 4일 법성포 이향(吏鄕)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문을 보내 폐막시정을 촉구했다.
“밝고 지혜로운 국왕께서 위에 계신데도 관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민폐의 근본은 이포, 향리들의 부정부패에 그 이유가 있으며 이포의 근본은 탐관에게 그 이유가 있으며, 탐관이 법을 어기게 된 것은 집권자의 탐욕 때문이다.
아! 나라의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면 잘 다스려지는 세상이 오고, 어둠이 변하면 밝음이 오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지금 우리들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려는 처지에 어찌 향리와 백성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근본을 궁구해보면 향리 또한 백성이다.
각 공문서상의 이포와 민막조건은 빠짐없이 와서 보고하라. 마땅히 구별할 방책이 있을 것이니, 가지고 오는 것을 걱정하지 말되 시각을 어기지 말라. 이 점을 마땅히 유념하여 알아둘 것이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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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 문화원장 정형택씨. 정원장은 활발히 문학활동을 하면서 영광지역 문화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번째 통문은 날짜를 알 수 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의로운 거사는 위로 종사를 보존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이니 두려워말고 동요하지 말라. 앞으로 개정개혁 해야 할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전운영(轉運營)이 향리와 백성들에게 폐단이 된 것, 균전관(均田官)이 폐단을 제거한다면서 폐단을 만든 것, 각 시정(市井)에서 돈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두는 것, 각 포구의 선주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 다른 나라의 잠상(潛商)들로부터 비싼 값으로 사들이는 것, 염분에 대한 시장세, 여러 물건을 도매하여 이윤을 취하는 것, 기전(起田)과 진전(陳田)을 막론하고 사전(私田)에 백지징세(白紙徵稅)를 하는 것, 오래된 환곡의 본전을 빼내는 것 등등 폐막의 조목조목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사농공상 네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위로는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아래로는 빈사상태에 있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앞서 밝힌 대로 동학농민군은 4월12일 영광을 점령한 뒤 14일에는 법성포로 진격했다.
한편 동학농민군들이 백산에 모여 난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고 조선조정은 4월 2일에 전라감사 겸 장위영 정령관이었던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진압토록 했다. 이에 홍계훈은 800명의 경군을 이끌고 인천을 거쳐 6일 군산에 도착했다.
홍계훈 부대는 4월 7일 전주에 도착했다. 마침 이날 전주감영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에게 대패했다. 홍계훈은 농민군의 전주 진격을 막기 위해 9일 경군 160명과 향병(鄕兵) 200명을 금구·태인으로 보냈다.
홍계훈은 농민군과 내통한 혐의로 전주영장 김시풍(金始豊) 등 4명을 11일 전주 남문 밖에서 효수하는 등 군기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일본 측이 남긴 기록에는 “초토사는 출병하지 않고 전투도 하지 않았으며, 토병(土兵)만 앞세웠기 때문에 불평이 많았다”는 내용이 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을 곧바로 진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농민군들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조정에 증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이 영광으로 진격한 이틀 뒤인 14일에서야 무장현 근처에 일부 병력을 파견해 농민군의 동태를 살폈다.
또 전라감사에게 향병을 동원시켜 순창-담양-광주-나주에 방어선을 구축토록 했다. 조정은 16일 총제영의 강화도 병정 400명을 증파키로 결정하고 다음날 일부 증원군을 파병했다. 증원군 파병소식을 접한 홍계훈의 경군은 4월 18일 전주를 출발했다.
홍계훈은 금구~태인~정읍~고창을 거쳐 21일 영광에 도착한 뒤 농민군의 동향을 살폈다. 이 때 농민군은 이미 영광을 떠나 함평에 머물며 장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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