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2.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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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웅 문화부 차장
대학 시절 영문과 교수가 말한 '매너'는 멋들어진 슈트나 억양이 아니었다. 겸양, 그리고 자기 절제의 자세였다.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신사는 결코 자기 생각을 바닥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방과 자신을 아울러 보호하기 위해 말을 아낀다.
뜬금없게도 신사도(紳士道)에 생각이 쏠리게 된 이유가 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법원 판결과 뒤를 이은 SNS의 소란 때문이다. 법원은 책 내용 중 34군데를 삭제해야 판매를 허가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이유였다.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가 점입가경이라고 할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책임도 지적하고 있는 책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다. 학자의 연구서지만 민족주의적 분노의 화살이 빗발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논란과 파문이 박 교수 개인을 둘러싼 헛소동에 그칠 사안은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와 학자의 양심, 그 한계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굴러갔다. '천하의 악녀(惡女)' '민족 반역자' 등 박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의 장(場)으로 변질한 것이다.
그 전위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어쩌다 이런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 '이제라도 사죄하시오' '이 사람 한국 사람 맞나' 등 증오와 저주의 언어를 직접 쓰거나 재인용했다. 선동적인 원래 글에 흥분한 인터넷 군중은 여성인 박 교수에 대한 성적 비하와 육두문자로 넘쳐나는 댓글을 줄기차게 달았다.
말 그대로 '조리돌림'이 되어버린 SNS의 성토를 바라보며 그 원색적이고 선동적인 언어를 걸러줄 최소한의 '매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가상공간에서 해방감을 느끼려는 익명 네티즌 모두에게 신사도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장 정도의 공인이라면 진영 논리나 이분법을 넘어 사회 통합까지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 너와 나를 아우르는 진정한 대화의 장을 위해서라도 냉정과 절제의 매너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 만나 대면(對面) 토론을 벌일 때까지 말을 아낄 수는 없었을까.
한 번도 미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콜린 퍼스가 영화 속에서 꽤 근사해보였던 게 명품 슈트를 입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재명 시장과 우리 정치가 쏟아내는 말에도 부디 그런 매너가 깃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