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천자문 들고가 문자 만든 왕인, ‘학문의 시조’로 추앙
이유종기자
입력 2015-06-17 03:00:00 수정 2015-06-17 08:27:36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3>왕인이 일본으로 간 사연
‘15대 천황인 오진(應神) 천황이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다면 보내 달라”고 청했다. 백제왕은 왕인을 추천했다. 일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청해 왔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16년 봄 2월의 일이다.…태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적(典籍·여러 사상 등이 적힌 책)을 배웠는데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종합>
이러한 일본 고대서의 기록들은 왕인이 당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고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고대 왜(倭)와 백제 왕실이 당대 석학을 청하고 또 선뜻 보내줬다는 것을 보면 두 나라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또 백제가 왜에 문명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일본 전역에 흩어진 왕인 박사의 흔적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는데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 시의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도 왕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있는데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大阪)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이다.
올 4월 9일 관광책자에 적힌 대로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 나가오(長尾) 역에 내렸다. 작은 간이 역사가 말해주듯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왕인묘가 역에서 멀지 않다고 책자에 적혀 있어 금방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어디에서도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일본 청년을 붙잡고 ‘왕인묘’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쓰카(王仁塚)’라고 물으며 종이에 한자로 ‘왕인(王仁)’이라는 단어를 적어 보여 주었다. 청년은 대번에 알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그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걸으며 일본 정부가 과거의 많은 기록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도 일본인들이 왕인 박사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으쓱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기와를 얹고 ‘백제문’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식 전통 문이 나왔고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보였다. 드디어 왕인 박사 묘에 온 것이다.
묘역에는 한국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99년 9월 5일 심은 기념식수도 보였다. 2008년 2월 29일 전남 영암군수의 무궁화 기념식수도 있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눈을 돌려 앞을 보니 ‘박사 왕인지묘’라고 해서체로 쓰인 비석이 있었다. 높이는 1m 정도 됐고 앞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 생화 몇 송이도 있었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천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짧은 참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10∼15분 정도 걸어가니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나왔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었다.
백제인 왕인, 그는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고대 일본 역사서들은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준, 이를테면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751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한시집 가이후소(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倭語)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표현해 그가 일본 문자 가나(假名)를 창안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서수(書首)와 문수(文首)의 시조’라고 적고 있다. 즉, ‘책(書)과 글(文)을 다루는 전문직의 우두머리(首)’라는 뜻이다.
왕인 박사는 또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했던 전통 정형시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 발간된 노래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는 내용의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왕인 박사가 지은 최초의 와카’라며 박사를 ‘와카의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는 또 박사가 오진 일왕의 4남인 닌토쿠(仁德) 일왕을 ‘난파(難波) 일왕’이라고 부르며 즉위할 것을 권고하며 난파진가를 지었다고도 했다. 이 기록들로 미뤄 볼 때 박사가 일왕에게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왕인 박사의 위업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일본 조정에서 문필과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계에도 진출해서 큰스님이 된 사람도 많다. 특히 설법과 사회 사업을 병행한 생활불교를 펴서 ‘민중의 구제자’로 일본인들이 흠모하는 대상인 교키(行基·668∼749) 스님도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인의 가문 전체가 일본 문화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오사카에서 만난 오사카오타니대 다케타니 도시오(竹谷俊夫)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류(韓流), 한류 하지만 사실 고대 일본에도 한류가 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왕인 박사야말로 한류의 1대 전도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 도래인(渡來人) ::
일본 말로는 ‘도라이진’이라 읽으며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다. 도래인의 유형은 왕인 박사처럼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러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과 고구려나 백제처럼 나라가 망해 삶의 기반을 잃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 두 유형으로 나뉜다.
※ 4회는 오사카에서 만난 백제 도래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히라카타=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한옥 기와에 ‘백제문’… 곳곳에 한국의 숨결 오사카 시에서 동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에 자리한 왕인묘 입구. 출입문 격인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한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백제문을 통과한 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리한 왕인묘. 가운데 비석에 ‘박사 왕인지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히라카타=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백제인 왕인(王仁)은 4, 5세기 정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에 백제 문화, 나아가 선진적 한반도 문화를 전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백제에서도 박사(博士) 칭호를 받은 당대 석학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가르치고 도자기, 기와 기술까지 전해줬다. 일본 고대 역사서들에 기록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15대 천황인 오진(應神) 천황이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다면 보내 달라”고 청했다. 백제왕은 왕인을 추천했다. 일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청해 왔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16년 봄 2월의 일이다.…태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적(典籍·여러 사상 등이 적힌 책)을 배웠는데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종합>
이러한 일본 고대서의 기록들은 왕인이 당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고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고대 왜(倭)와 백제 왕실이 당대 석학을 청하고 또 선뜻 보내줬다는 것을 보면 두 나라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또 백제가 왜에 문명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일본 전역에 흩어진 왕인 박사의 흔적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는데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 시의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도 왕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있는데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大阪)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이다.
올 4월 9일 관광책자에 적힌 대로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 나가오(長尾) 역에 내렸다. 작은 간이 역사가 말해주듯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왕인묘가 역에서 멀지 않다고 책자에 적혀 있어 금방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어디에서도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일본 청년을 붙잡고 ‘왕인묘’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쓰카(王仁塚)’라고 물으며 종이에 한자로 ‘왕인(王仁)’이라는 단어를 적어 보여 주었다. 청년은 대번에 알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그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걸으며 일본 정부가 과거의 많은 기록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도 일본인들이 왕인 박사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으쓱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기와를 얹고 ‘백제문’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식 전통 문이 나왔고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보였다. 드디어 왕인 박사 묘에 온 것이다.
묘역에는 한국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99년 9월 5일 심은 기념식수도 보였다. 2008년 2월 29일 전남 영암군수의 무궁화 기념식수도 있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눈을 돌려 앞을 보니 ‘박사 왕인지묘’라고 해서체로 쓰인 비석이 있었다. 높이는 1m 정도 됐고 앞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 생화 몇 송이도 있었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천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짧은 참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10∼15분 정도 걸어가니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나왔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었다.
영암군에 세운 왕인 동상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세워진 동상. 영암군에서 세운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왕인 박사의 존재는 조선시대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동아일보DB
○ 왕인박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묘역백제인 왕인, 그는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고대 일본 역사서들은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준, 이를테면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751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한시집 가이후소(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倭語)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표현해 그가 일본 문자 가나(假名)를 창안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서수(書首)와 문수(文首)의 시조’라고 적고 있다. 즉, ‘책(書)과 글(文)을 다루는 전문직의 우두머리(首)’라는 뜻이다.
왕인 박사는 또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했던 전통 정형시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 발간된 노래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는 내용의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왕인 박사가 지은 최초의 와카’라며 박사를 ‘와카의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는 또 박사가 오진 일왕의 4남인 닌토쿠(仁德) 일왕을 ‘난파(難波) 일왕’이라고 부르며 즉위할 것을 권고하며 난파진가를 지었다고도 했다. 이 기록들로 미뤄 볼 때 박사가 일왕에게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왕인 박사의 위업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일본 조정에서 문필과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계에도 진출해서 큰스님이 된 사람도 많다. 특히 설법과 사회 사업을 병행한 생활불교를 펴서 ‘민중의 구제자’로 일본인들이 흠모하는 대상인 교키(行基·668∼749) 스님도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인의 가문 전체가 일본 문화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오사카에서 만난 오사카오타니대 다케타니 도시오(竹谷俊夫)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류(韓流), 한류 하지만 사실 고대 일본에도 한류가 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왕인 박사야말로 한류의 1대 전도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 도래인(渡來人) ::
일본 말로는 ‘도라이진’이라 읽으며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다. 도래인의 유형은 왕인 박사처럼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러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과 고구려나 백제처럼 나라가 망해 삶의 기반을 잃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 두 유형으로 나뉜다.
※ 4회는 오사카에서 만난 백제 도래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히라카타=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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