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치수-제방공사 주도… 옛 오사카 도시 설계자는 백제인

화이트보스 2015. 6. 18. 10:21

치수-제방공사 주도… 옛 오사카 도시 설계자는 백제인

이설 기자

입력 2015-06-18 03:00:00 수정 2015-06-18 04: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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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4>오사카의 백제 도래인들

① 일본 오사카 시 이쿠노 구 한인촌 입구에 위치한 미유키모리 신사. 신사 관계자는 “한일 관계, 북핵 문제 등 남북한 관련 뉴스를 전할 때면 ‘한인촌’의 상징인 이곳을 배경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② 이쿠노 구와 나란히 붙은 히가시스미요시 구의 남백제 소학교(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사카 시에는 백제역, 백제시계점, 백제대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존재한다. 미유키모리 신사 제공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본격적인 쟁탈전을 벌이던 4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아직 국호(일본)도 없이 초기 국가 형성 단계로 들어간 왜(倭)와 긴밀하게 교류한다. 우리 조상들이 서로 피 튀기는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 ‘왜’와는 각자 긴밀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한반도 도래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3국 중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한 나라는 백제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항로상으로도 제일 유리했다. 문화적으로도 수준이 높았던 백제는 점차 기울어가는 국가적 운명 앞에 왜에 문명과 기술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상생(相生)을 도모했다.

일본에서 백제의 흔적이 두드러진 곳으로 일본 제2의 도시이자 항구 도시인 오사카(大阪)가 꼽힌다. 이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일본 열도를 이루는 4개의 큰 섬 중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오사카 항에 닿게 된다. 오사카를 초입으로 삼는 혼슈 간사이(關西) 일대에는 이코마(生駒) 산을 경계로 2개의 큰 평야(오사카·나라 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생활환경이 우리와 비슷하고 물산도 풍부해 백제인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 오사카 곳곳에서 만난 백제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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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최대 중심지이자 한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난바(難波).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쿠노(生野) 구(區)는 오사카 내 최대 한인촌이다. 구민 4분의 1 이상이 한국인이다 보니 구청 홈페이지에 한글 버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이쿠노 구에는 백제 관련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 신사는 물론이고 ‘백제’의 일본 음독인 ‘구다라’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는 지명이나 시설물이 많다. 미유키모리(御幸森) 신사만 해도 백제인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어온 왕인(王仁) 박사의 제자 닌토쿠(仁德) 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쿠노 구 옆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구도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백제역(구다라 에키), 백제강(구다라 가와), 백제 시계점(구다라 도케이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있었다. 이 중에 ‘미나미구다라(南百濟) 소학교’가 있다.

어찌된 연유로 일본 초등학교가 ‘남백제’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연유가 궁금해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기자의 청에 선뜻 응해준 오가 마사노리 교장(56)과 나루세 모리카즈 교감(51)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들어섰다.

작고 소박하게 꾸며진 교장실에 들어서자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역대 이사장과 교장들의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874년에 개교해 현재 141년에 이르는 학교의 긴 역사를 대변하는 사진이었다. 오가 교장에 따르면 학교는 처음에 ‘스미요시 구 제4번소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유타카 소학교’로 바뀌었고, 1889년 이쿠노 구의 행정 지명이 개편되면서 ‘미나미구다라 소학교’로 최종 이름이 확정됐다. 이 초등학교는 1950년 전교생이 2400명일 정도로 컸지만 저출산 탓에 취학 아동이 대거 줄면서 지금은 규모가 작아졌다.


○ 미나미구다라 소학교에 얽힌 사연


나루세 교감은 “오사카 지방에 백제 도래인이 대거 몰리자 서기 646년 이 일대는 백제군(群)이라는 정식 행정구역으로 지정됐다”며 “이후 서기 765년 일본 왕실이 펴낸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나 서기 791년에 일본 왕실이 펴낸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백제군(百濟郡·구다라고리)’이라는 명칭이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1098년 일본이 제작한 오사카 고지도 ‘난바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에도 오사카를 ‘백제국’이란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은 “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 문헌에 따르면 5세기부터 백제 도래인들의 오사카로의 진출이 대거 본격화됐는데 결정적 계기는 660년 백제 패망이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이미 일찍이 왜에 정착해 있던 가족과 지인들을 찾아 집단으로 망명 이주했다”며 “왕인 박사를 비롯해 5세기 이후 일본에 건너온 백제 도래인들은 다양한 유·무형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왕실도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 구와 이쿠노 구 일대에 도래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땅을 주고 생활기반 시설을 만들어 주는 등 배려했다고 한다.

오사카로 온 백제 도래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 지배층들의 성씨 1182개의 내력을 기록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815년)’에는 “4세기 대규모 치수공사, 제방공사 등은 백제인이 설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토목 직물 제철 도기 농경 목축 등의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역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가 교장은 “처음에는 우리도 잘 몰랐다. 기자와 학자들이 찾아와 학교의 역사를 묻는 일이 많아 교사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며 “여러 문헌을 통해 오사카는 백제인들이 건너오면서 도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오사카에는 백제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유적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 항 근처 높이 15.4m, 폭 62m에 달하는 대형 저수지 사야마이케(狹山池)이다. 홍수 방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오사카 주민들의 농업·생활용수를 담당하고 있는 이 저수지 역시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사야마이케 박물관은 밝히고 있다.

오사카 시 최초의 다리 ‘인덕교(仁德橋)’를 세운 것도 도래인이었다. 이쿠노 구를 설명하는 책자에는 ‘인덕교는 서기 323년 구다라 강(백제강)에 건설된 다리로, 일본 문헌에 나오는 다리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 베틀… 부뚜막… 흙벽… 의식주까지 통째로 바꿔 ▼

백제 도래인들이 日에 끼친 영향


백제 도래인들은 학문이나 사상(불교)은 물론이고 의식주까지 고대 일본인들의 생활을 통째로 바꾸었다. 2005년 오사카 부 히라가타(枚方) 시 인근 나스즈쿠리(茄子作) 유적에서 나온 5세기 백제 베틀은 백제인들이 왜인들에게 재봉술을 가르쳤다는 문헌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백제 역사를 연구하는 일본인들의 시민단체 ‘백제회’를 이끌고 있는 하나무라(花村·77) 회장은 지난달 12일 기자와 만나 “일본서기에 5세기 초반 백제 재봉사가 일본 왕실에 건너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방사성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발굴된 베틀과 시기가 일치한다”고 했다.

주거 형태도 일대 변화를 맞았다.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움막집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단단한 지붕과 흙벽을 만들어 살게 된 것도 백제인들로부터 영향 받은 바 크다. 오사카 부 나라(奈良) 현 가시하라(강原) 시에서 이런 형태의 집터가 처음 발견됐는데, 1990년대 중반 한국 공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터가 나오면서 백제식 주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연민수 실장은 “6세기에는 백제식 부뚜막이 널리 퍼져 일본의 식생활을 크게 바꿨다”고 했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은 캠핑장처럼 야외에서 취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비를 들여가며 한일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하나무라 회장은 “어린 시절 친구들이 건너온 나라(한국)와 내 조국(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닮은 것이 많아 전율이 일 정도”라며 “교류의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 구다라 ::

일본 사람들은 백제를 ‘百濟’라 쓰고 ‘구다라’로 읽는다. 고대 오사카를 구다라스(百濟州)로 불렀다. 백제를 일본말로 ‘구다라’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부여의 백마강 나루터인 ‘구드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사카=이설 기자 snow@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5회는 오사카를 지배했던 백제왕 닌토쿠 왕가의 비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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