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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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지도자 31인의 북·중 접경지대 1400㎞ 평화 오디세이 첫 기착지 단둥은 우리 역사에선 통곡의 땅이다. 1636년 병자년에 시작된 호란(胡亂)이 끝난 1637년 정축년에 청(淸)군의 포승줄에 묶인 조선의 백성들이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뜬눈으로 밤을 새운 곳이다. 50만 명이 선양의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갔다. 어렵게 돌아온 여인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환향녀’라고 버림받았고, 태어난 아이는 ‘호로자식’이 되어 유령처럼 산하를 떠돌았다.
나는 야경이 아름다운 단둥에서 김훈이 바라보았을 강 건너의 칠흑 같은 신의주를 응시했다. 무능한 왕조를 원망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포로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혈관에 흐르는 환향녀와 호로자식의 서러운 피를 실감했다. 그리고 오늘의 한반도가 처한 무서운 운명에 몸서리쳤다.
한국과 러시아·중국은 끔찍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공통의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승전국이지만 우리는 남의 힘으로 해방됐다. 그래서일까. 러시아(5월 9일)에 이어 중국(9월 3일)도 종전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승절을 국제 행사로 준비하고 있지만 한국은 구경꾼일 뿐이다. 지금 정부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첫 회의를 올해 3월에야 열 정도로 무신경하다. 6·15 선언 15주년 남북 공동행사도 무산됐다. 우리 운명의 엄중함을 객관적으로 분별하고 더불어 돌아보겠다는 의욕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존재를 직접 확인한 베테랑 외교관들의 소회는 특별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북한 땅 바로 앞에 온 건 외교관 생활 40년 만에 처음인데 누구보다도 북을 잘 알아야 할 외교관으로서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고백했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심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 전 대사는 “신참 외교관은 북·중 접경지대를 필수 코스로 체험해야 한다”고 했다. 내 삶의 존엄성이 확보되는 유일한 터전인 한반도의 운명을 염두에 두지 않는 강대국 중심의 사고로는 국적불명의 영혼 없는 외교에 갇힐 수 있다.
현지 소식통은 “평양의 신임 중국 대사가 3월에 부임했는데 아직도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만나지 못했다”고 전했다.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은 서로의 전승절에 참석해 밀월관계를 과시하지만 북·중 관계는 얼어붙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9월 3일의 중국 전승절 행사에 김 제1위원장이 참가하거나 별도의 북·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3차핵실험과 장성택 처형으로 냉각된 북·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북·중·러 3각동맹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태여서 한국은 미·일에 가까워지는 한·미·일 3각동맹으로 기울게 된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시대착오적 신냉전 대결구도가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를 질식시키고 있는 분단 구조는 해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압록강대교를 건설하고 황금평을 50년간 빌린 중국은 인근 단둥에 고층 아파트와 상가를 짓고 불 꺼진 신의주를 바라보고 있다. 북한이 제대로 열리기만 하면 중국의 자본과 기술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갈 것이다.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는 “남북이 서로 팔짱 끼고 기싸움하는 동안 중국이 자기네 속도대로 차곡차곡 대전략을 실행해나가는 데 충격을 받았다”며 “우리도 이제 이니셔티브를 잡을 수 있게 크게 크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남한이 주도적으로 나설 때 비로소 문이 열릴 수 있음을 접경지대를 보면서 깨달았다”고 했다.
분단 70년,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북한과 중국·러시아의 국경선에는 뭔가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주도로 남북관계를 풀지 않으면 외세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멀리 단둥에서 당나라·몽골·후금·청나라와 마오쩌둥 군대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운명을 지킬 수 있는가.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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