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 노래하라 … 강이 우리에게 이른다

화이트보스 2015. 7. 13. 11:27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 노래하라 … 강이 우리에게 이른다

[중앙일보] 입력 2015.07.13 00:02 / 수정 2015.07.13 00:23

[평화 오디세이 2015] 참가자 릴레이 기고 <1>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평화 오디세이 여정 둘째 날인 지난달 23일 압록강단교 위를 걷고 있다. 신의주와 단둥을 이었던 이 다리는 6·25 때 미군의 폭격으로 중간 부분이 끊어져 북한과 단절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생명의 젖줄이었던 두만강과 압록강

침략의 시대 거치며 경계선으로 변질돼

분단 70년 지금도 불임(不姙)의 강일 뿐

남한 국민에겐 통일이 대박이지만

이대로 통일되면 북녘 사람은 2류 전락

시민성만이 한민족 통합의 전제조건

이웃과 다른 계층 배려하는 시민의식

그 시민의식 없이 통일이 다가온다면

동아시아 평화도, 인류 공존도 없다




강은 초라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은 없었고, 모래톱에 걸린 낡은 나룻배만 느린 강물을 감당하고 있었다. 간도에서 바라본 북녘 땅은 지척이었으나 가뭄에 한껏 말라붙은 강은 도강(渡江)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른 강은 국경이었다. 북녘 산은 남루한 촌부처럼 피곤했고, 마른 여인의 가슴 같은 무생산성의 서글픈 능선이 겹쳐졌다. 능선을 몇 굽이 돌면 조금은 풍성한 벌판이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강의 하구(河口)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반도 북단, 북·러·중 국경이 포개진 그 미묘한 영토를 훑고 가는 두만강은 남한 지식인들과 정권의 벅찬 기획과는 달리 미래의 생산성을 기약할 것 같지 않았다. 나진발(發) 러시아산 기차가 북·러를 잇는 구식 철교를 조심스레 건너는 풍경을 빼면 강 하구는 적막이었다. 북간도와 만주로 향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애끓는 스토리를 그 마른 품에 짐짓 감춘 듯했다. 도강을 허용했던 강은 국경이 아니다. 도저한 물결에 뱃사공 노래 자락이 흘렀던 강은 국경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메마른 풍경은 국경이었다. 적막해서 슬픈 국경이었다.

 고대 부족들이 출현해 만주 벌판에 번성할 때 두만강과 압록강은 생명수였다. 너의 땅, 나의 강이 따로 없었다. 만주벌의 울창한 산림은 인간과 동물이 햇살 받아 살아가는 생명의 공유지였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지류(支流)들은 싱그러운 몸을 씻는 공동의 우물터였다. 고구려 발원지인 지안(集安) 5호 고분벽화엔 호랑이·사슴·인간이 뛰어논다. 공유의 자연과 공생의 지혜다. 사냥하는 인간도, 사냥 당한 동물도 천신(天神)의 명령에 행복하게 살다 묻히는 곳이었다. 인종과 부족의 다름은 문제가 아니었다. 형질과 골격을 달리하는 이족(異族)들이 함께 어울려 행복한 생활공동체를 이뤘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 벽화는 말없이 입증하고 있는 거다. 고구려 장수왕은 이족 공동체가 천신의 은혜를 한껏 누리도록 약속해 지금도 돌무덤 장군총 위에 누워 있다. 모진 바람에 육신은 풍장됐을망정 영혼은 남아 그 근처를 맴돌고 있는 거다. 부족들의 원시적 생명 공감은 어찌 고구려뿐이었을까. 여진·거란·말갈족 모두 백두산을 신단수로 여겨 사방에서 제례를 올렸다. 동맹·영고 등 명칭은 달라도 하늘을 향한 제사는 모두 백두산 천지를 향한 무도(舞蹈)였고, 팔방에서 행해진 주술의 향연은 천수(千壽)와 풍작을 갈망하는 부족들의 순진무구한 봉화(烽火)였다.

 ‘신화의 시간’에 두만강과 압록강은 모든 생명체가 사랑하는 젖줄이었다. 몸을 담그고 물을 길러 쓰는 데에 누구의 허락이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부족의 명멸과 국가의 성쇠가 거듭되자 생명의 젖줄은 경계선으로 변질되었다. 아니 국가의 이기적 욕망이 강의 본질을 바꿔버렸다. 고구려가 쫓기듯 남하한 이후로 만주와 한반도가 나뉘어졌다. 이후 천오백 년 동안 한민족의 삶은 한반도에 한정되었고, 백두산 천지가 여러 부족들과 공유한 신화의 지혜를 잊었다. 각박한 삶이었다. 각박한 삶은 국경의 장벽을 높인다. 제국 일본이 일어섰던 20세기 ‘침략의 시대’에 압록과 두만은 급기야 자연의 강이기를 그치고 제국수비대의 방어선으로 전락해야 했다. 대륙에서 보면 한반도는 바다로 나가는 곶이다. 대륙의 여러 제국들이 대양으로 뻗어 나가려고 곶을 탐했다. 멀게는 몽골·후금이 한반도로 내려왔고, 가깝게는 러시아가 남진했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가슴에 꽂힐 비수로 생각했다. 대륙에서 떨어져 고립무원의 시간을 견뎌온 일본이 열도를 겨냥한 칼날 같은 한반도를 항상 불안하게 생각해온 이유다. 곶이자 비수인 한반도가 제국적 탐욕의 제물이 되는 건 이런 지정학적 운명 때문이었다. 중국은 아예 속국이라 했고, 러시아는 남진 기지라 했으며, 일본은 자국 수호의 이익선으로 간주했다. 제국 일본이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한반도는 대륙에 일만선(日滿鮮) 일체의 황국이데올로기를 역으로 꽂아 넣는 도끼날로 변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피의 경계선이 된 까닭이다.

 이 엇갈리는 제국의 탐욕이 기승을 부릴 때도 강은 디아스포라의 도강을 허용했다. 땅 없는 빈농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학생 시위에 연루돼 일경(日警)에게 쫓기던 소년 이미륵이 무산진 압록강을 건너 독일로 갔다. 귀향을 기약하기는 어려웠으나 아직은 건널 수 있는 강이었다. 이상설이 간도에서 학교를 열었고, 시인 윤동주가 명정촌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 아쿠타가와상 가작을 받은 소설가 김사량(金史良)이 신의주 철교를 건너 태항산 유격대와 합류했다. 항일유격대와 임시정부 요인들도 압록과 두만을 ‘피의 강’이 아니라 ‘생명의 강’으로 만들려고 만주와 상하이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지금은 막힌 강, 헐벗은 강, 초라한 능선만 드러낸 불임(不姙)의 강이 되었다. 분단 70년 동안 그랬고,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늘도 그러하다. 간도 이편에서 바라본 저 강은 오랫동안 건널 수 없는 강, 국경이었다. 귀향이, 그 뒤에 오는 벅찬 재회가 디아스포라의 서러움을 씻어줄 역사의 회복이라면, 저 강은 경계(警戒)의 눈초리로 우리를 막아선다. 도강의 기억은 선명한데 귀향은 여전히 멀다는 현실감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피의 경계선 저쪽에서 북한은 마치 현실에서 유체 이탈한 이념의 가두리 양식장처럼 보였다. 통일은 아득한가?

통일은 낯선 신부처럼 온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누구도 몰랐고, 누구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히로히토 일왕이 고했던 ‘종전 선언’은 라디오 잡음과 섞여 외계인의 지구 방문을 알리는 성명처럼 들렸다. 이렇게 말했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네 나라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하는 바를 통고시켰다.” 이게 항복 선언임을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으랴. 친일 전향을 자책해 초야에 은신했던 작가 이태준, 심지어 남양주에 기거하던 이광수조차도 16일에야 해방을 알았다. 15일 경성 거리는 조용했다. 16일에야 태극기 물결이 출렁거렸다.

 통일은 어떻게 올까? 지난 70년 동안 통일담론은 무성했지만, 전략은 언제나 흐릿했다. 정권마다 날렵한 개념을 붙여 내놓는 통일 상품들은 유통기한이 고작 5년이어서 정권 교체와 함께 곧장 폐기되곤 했다. 세계가 주목한 ‘햇볕정책’은 노벨상을 품에 안겨주긴 했으나 곧 효력을 상실했다. 뒤를 이은 ‘균형자론’ ‘개혁·개방 3000’, 그리고 ‘신뢰 프로세스’까지 북한은 주적(主敵)과 동반자라는 극개념 사이를 진자 운동했다. 일방적이고 선언적이었다. 어떤 것은 너무 퍼주었다는 비난에, 어떤 것은 너무 끊었다는 질책에 시달렸다. 현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는 평양에서 신뢰를 보낼 때까지 신뢰를 안 주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수틀리면 미사일을 쏴대는 북한에 신뢰를 구걸하기 전까지 평양 지도부가 자성하는 일은 없겠으므로 신뢰 프로세스는 그냥 ‘기다림 프로세스’로 끝날 개연성이 크다. 훈춘·나진·선봉 개발사업이나 유라시아 철도 구상안이 참신함만 빛난 채 기다림 속에 잠자는 이유다. 다음 정권에는 과연 어떤 이름의 신상품이 선을 보일까.

 한국의 노련한 외교관들은 6자회담을 넘어서야 함을 강조한다. 한반도 비핵화가 가장 시급한 의제이기는 하지만 긴장 완화, 경협, 통일 방안과 평화체제 구축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려면 6자회담 외에 3자, 4자 회담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자회담에서 한국의 입장은 강대국의 종속변수다. 그런데 비무장지대 철책은 누가 걷어주지 않는다. 통일은 남북 당사자의 일이다. 통일 논의에서 주권 회복이 급선무인데, 어쨌든 남북 간 소통회로를 만들고, 작지만 중요한 조치를 이미 실행했어야 했다. 독일 통일의 책사였던 에곤 바(Egon Bahr)는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지 말고, 가령 통행증 발급 같은 작은 조치를 고안하고 실천하는 게 긴장 완화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통행증은 베를린 장벽을 결국 무너뜨린 물방울이었다. 그가 권한 ‘접근을 통한 변화’는 인내심과 시간을 요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적 통합’이라는 더 험준한 과제가 있다. 서독인(Wessie)과 동독인(Ossie) 간 사회적 통합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했는데도 말이다. ‘통일은 낯선 신부처럼 왔다’고 누군가 근심 어린 감격의 말을 할 날이 오기는 올 것이다. 그녀가 누군지, 성격은 어떠한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모른 채 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각방살이, 더부살이, 아니면 무조건 합방? 1국 2체제, 혹은 연방제? 아직도 모호하다. 남북이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단계별로 합의해 가야 할 필연성이 여기에 있다. 해방 후 찾아온 극심한 혼란은 전쟁을 초래했고 분단을 강제했다. 북한은 현정권이 의기양양하게 내놓은 ‘통일대박론’을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흡수통일론’으로 간주한다. 해방 공간보다 더 치명적인 분열과 격돌이 통일로부터 발원한다면 남북 간 진정한 내적 통합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광복 70주년, 헐벗은 북한 산하가 발신하는 역사의 통증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에게 스스로 묻는다.

국민, 시민, 세계시민

기성세대가 감동했던 영화 ‘국제시장’은 눈물겨운 ‘국민’의 스토리였다. 나와 가족, 국가의 역사(役事)에 헌신하며 인생을 꾸려 왔던 기성세대가 흘린 눈물에 청년세대는 역겨워했다. 다 누렸던 세대가 웬 눈물? 우리는 ‘88만원 세대’이고 ‘비정규직 세대’다! 이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시민성을 잃고 살아왔음을 말이다. 동세대, 후세대가 어떻게 살고 살 것인지를 살피지 않고 그저 나를 위해 정신없이 투신한 외눈이 세대임을 말이다. 한국이 선진국 문턱까지 치달아 올라옴으로써 나와 국가의 ‘수직적 관계’는 완료됐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읊조린 그 넋두리는 ‘충직한 국민’의 임무완료를 결재한 말 도장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웃, 타 계층, 타 집단의 형편을 두루 배려하는 시민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 공익에의 긴장, 그리고 약자와 빈곤층을 위한 양보와 자제, 시민성의 요체라고 할 이 ‘수평적 관계’의 가치관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사회질서가 시민을 씨줄로, 국민을 날줄로 해서 엮인다면 한국 사회는 날줄만 있는 엉성한 구조다. 상황이 이럴진대 통일 후 북한 주민을 과연 같은 ‘시민’으로 여기겠는가? 통일은 남한 국민에게는 대박이겠지만, 북녘 사람들에게는 종속의 시작이다. ‘2류 국민’의 시작이다. 오씨와 베씨의 대립처럼 남한인과 북한인의 본원적 차별이 시민의식의 결핍 속에서 정당화된다. 통일은 접수가 아니라 같이 살 난망한 현실의 시작이다. 시민성이 내적 통합의 전제조건인데 아직 우리 마음에 시민성은 싹트지 않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압록과 두만의 변경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면 한·중·일 삼국 중 시민사회가 살아 꿈틀거리는 곳은 한반도뿐이다. 일본의 시민은 제국주의에 의해 짓눌렸고, 중국의 시민은 탄생 이전이다. 시민 없는 신민족주의가 충돌하는 곳, 동아시아에서 그 독기(毒氣)를 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디아스포라의 고난을 알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일본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민족은 한민족뿐이다. 70년 동안 체형과 형질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북녘 사람은 훈민정음을 쓰고 아리랑을 부른다. 김치를 담그고 한옷을 입는다. 문자공동체·문화공동체는 세월에도 닳지 않는다. 남한인들이 압록강·두만강을 눈물 없이 볼 수 없듯이 북녘 사람들은 굽이치는 한강에서 아리랑을 기억한다. 강(江)은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 노래하라고 우리에게 이른다. 그게 수평적 관계이고, 시민성의 생성이다. 공존·공생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을 찾아 길을 트는 강물은 시민성의 본질을 닮았다. 공평과 평등의 원기를 담고 흐른다.

 남한과 북한은 이념대결의 디아스포라, 원형에서 분리되어 결코 귀환하지 못하는 떠돌이였다. 이제 그 떠돌이의 역사를 끝낼 때가 되었다. 시민성을 각성하는 것, 북녘 사람들이 아무리 이족(異族)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동족동조의 동반자 의식으로 이 시대를 함께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저 강의 국경선, 한반도를 절단한 비무장지대를 허물 시민성의 각성은 더 나아가 지구적 분쟁을 끝낼 ‘세계시민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한반도 통일은 동아시아 평화의 조건이고, 더 크게는 인류의 공존을 지켜낼 횃불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시민에서 ‘세계시민’으로 나아가는 디딤돌, 그게 통일이다. 그런 각오라면, 저 강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피의 경계선을 공존의 생명수로 바꾸려는 각오를 새롭게 한다면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