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반에 군대를 다녀온 한 어르신이 해준 말이다. 깃발이 내려진 날, 그러니까 사단장이 자리를 비운 날이 바로 ‘무두일(無頭日)’이었다. 머리, 즉 조직의 보스가 없는 날은 긴장을 풀어도 되는 날이란 뜻이다.
군인만 그럴까. 어떤 조직이든 최고경영자(CEO)가 자리에 있는 날과 없는 날, 직원들의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보스가 있는 날 간부들은 보고거리를 챙기고 조직은 바짝 죈 기타 줄처럼 팽팽해진다. 그래서 CEO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부하의 입장은 다르다. 작고한 경영컨설턴트 구본형이 책 ‘더 보스 쿨한 동행’에서 썼듯이 부하에게 무두일은 ‘자유롭고 숨쉬기 편하며 일을 해도 즐거운’ 날이다.
이런 모든 논의는 보스가 없는 날이 하루 이틀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다. 그런데 요즘 거의 매일이 무두일인 조직이 있다. 바로 세종시 공무원 조직이다.
2012년 9월 총리실을 시작으로 정부 부처들이 세종시로 이전하기 시작했으니 이달로 꼭 3년째다. 세종시와 주변 지역의 집값이 뛰고 인구 유입도 늘었다. 충청지역은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중요해졌다. 하지만 이전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우려됐던 비효율과 정책의 질 저하 문제도 현실화되고 있다. 주로 장차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서울의 청와대와 국회를 찾아다니느라 자리를 자주 비워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예전엔 사무관이 보고서를 써서 과장에게 제출하면 ‘이런 표현은 빼는 게 좋겠다. 내가 사무관 시절에…’라는 식으로 경험담을 들려주며 후배들 트레이닝을 시켰죠. 그런데 지금은 모든 보고가 e메일이에요. 상사가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상사들은 태블릿 PC로 KTX나 차 안에서 보고서를 봅니다. 일일이 전화해 고칠 점을 가르쳐주기보다 대충 고쳐 빨리 장관에게 보고하는 게 급선무가 된 거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 듯이 상사 눈앞에서 ‘깨지는’ 것만큼 일을 빨리, 확실히 배우는 길은 없다. 메신저로, e메일로는 깨져 봤자 감도에서 현저히 차이가 난다.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도 커진다. 정책 결정의 지연도 일상화됐다. 상사가 자리를 비우면 분초를 다투는 시급한 일이 아닐 경우 아무래도 결재 자체를 미루게 되기 때문이다. 국책연구소에서 근무했던 한 교수는 “같은 부처에서 같은 업무를 보던 공무원이 세종시 이전 이후에는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업무 반응 속도가 확 떨어졌다”고 했다.
기재부의 한 국장은 이런 말도 했다. 과거에는 장관 이하 1급 간부들이 아침에 모여 티타임을 하는 일이 잦았으나 이제는 다 같이 모이는 날이 현격히 줄어들었다고. 그러다 보니 다른 국실 간 의견을 조율해 ‘집단지성’을 모으는 힘이 약해졌고, 그 결과 국내 최고의 공무원 인재들이 모인 기재부에서 최근 나오는 정책들이 엇박자를 내는 경우가 생겼다고.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국장은 “미국에 연수 갔을 때와 생활이 비슷해졌다”라고 말했다. 정시 출퇴근에 가족들을 챙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는 면에서 말이다. 회식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팀 결속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세종시의 무두일을 줄이기 위해 나서야 할 조직은 공무원의 ‘갑’인 국회다. 사소한 논의를 위해, 혹은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을 벌세우기 위해 수시로 서울로 불러올리는 일을 줄여야 한다. 정부가 만든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까 봐 의원들이 부르면 한달음에 달려가야 하는 게 공무원들이다. 필요하면 전화회의나 화상회의를 활용하면 된다. 그래도 대면회의할 일이 있다면 주말을 낀 월요일이나 금요일을 ‘회의의 날’로 정해 몰아서 회의하는 건 어떨까.
하임숙 경제부 차장 artemes@donga.com
무두일(無頭日)
입력 2005-09-10 03:00:00 수정 2009-10-08 20:39:48

▷한때 청와대에서도 ‘무두일’이 화제였다. YS 정권 때의 일화(逸話) 하나. 한 기자가 L 수석비서관에게 말했다. “내일 대통령이 해외 출장을 떠나면 완전한 자유의 몸이네요. 그동안 푹 쉬세요.” 수석비서관이 맞받았다. “무슨 소리예요. ‘무두일’인데 더 꼼꼼하게 청와대를 챙겨야지. 언제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올지 모르는데.” 당시 청와대의 대부분 비서관에게 ‘무두일’은 ‘해방의 날’이 아니라 더욱 부담스러운 날이었다.
▷‘무두일’에 사고가 난 경우도 있다. 참여정부 첫해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으나 당직 근무자가 잠을 자는 바람에 연결되지 못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라 밖에선 곧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나라 안에서는 화물연대 파업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24시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작동해야 하는 대통령과 비서실 간의 지시·보고 시스템이 멈춰 버린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번 중남미 순방 기간에는 청와대의 ‘뒷문’이 열리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엊그제 출국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이 나가니 나라가 열흘은 조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정론(聯政論) 등 대통령의 숱한 정치적 발언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대통령 말씀의 가벼움’이 오히려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대통령 귀국 후에도 ‘나라의 조용함’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날이면 날마다 ‘무두일’ 같으면 좋으련만.
송 영 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