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일제 36년의 만행

짓밟힌 꽃잎

화이트보스 2015. 9. 22. 11:08

짓밟힌 꽃잎

짝사랑 고백도 못해본 16세였다

자신이 꽃이란 걸 잊어버린 소녀가 있었다. 열 여섯살쯤 됐을까. 짝사랑도 고백해보지 못한 소녀였다.
소녀의 조국 조선은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였다.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성노예 역할을 하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1945년 해방된 조국은 소녀를 외면했다. 소녀는 위안부 사실을 숨긴 채 할머니로 늙어갔다. 2015년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다.
평균 나이 89.1세. 47명의 위안부 여성이 아직 살아있다. 저들에게 빛을 되돌려줘야 한다.

문신 공점엽 할머니

나를 견디게 한 건 팔목의 점 3개
공점염(95) 할머니의 왼팔에는 까만 점 세 개가 있다.
지옥같은 위안소에서 할머니를 처음 웃게 해 준 언니들과 새긴 문신이다. 할머니는 해남, 언니 셋은 순천과 광주, 전주에서 끌려왔다. “추울 적엔 한 방에서 껴안고 고향 얘기하며 버텼제.”서로를 의지하던 네 명의 소녀는 바늘에 먹물을 묻혀 각자의 팔에 동그란 점을 하나씩 새겼다.
“순천언니, 광주언니, 이건 전주언니….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싶어.”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팔 위에서 세 개의 문신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훈장 김군자 할머니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 돕고 싶었지
2억1000만원. 김군자(89) 할머니가 기부한 돈이다. 중국 훈춘의 위안소에 끌려갔던 할머니는 해방 후 닥치는대로 일했다. 식모살이, 옷 보따리 장사…. 할머니는 이렇게 모은 돈에 정부 지원금까지 보태 고아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놨다.
“부모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이렇게 힘들었나 해서….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지.”
2014년 12월 정부는 할머니에게 국민훈장(동백장)을 수여했다.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훈장을 꺼내보고 있다.

곶감 강일출 할머니

한창 멋 부릴 때 못해본 게 한 맺혀
강일출(87) 할머니는 아버지가 감농사를 크게 해서 ‘곶감집 막내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열여섯이 되던 해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인생이 뒤집혔다.
한창 멋부릴 나이에 삶이 짓밟힌 할머니는 맺힌 한을 풀어내듯 매일 손톱을 색칠한다. 곱게 칠한 손으로 곶감을 하나씩 집어드는 게 일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릴 적 아버지가 챙겨주던 곶감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향 생각이 간절해지면 곶감을 먹어요. 그런 날은 잠도 못 자.”

약술 박숙이 할머니

몸 나스면 학생들 만나야 돼
박숙이(93) 할머니는 열여섯 살 때 조개를 캐러 가다 일본 군인들에게 붙잡혀 위안소로 끌려갔다.
해방 후엔 중국과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엔 1남2녀를 입양해 키웠다. 할머니는 건강할 때 직접 산에가 약초를 캐 술을 담갔다.
이웃들과 술을 나눠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최근엔 건강이 악화돼 요양원에서만 지낸다. “학생들 만나서 옛날 역사 알리야 하는데… 조상들 고생한 거….”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한복 이용수 할머니

‘엄마’ 소리 귀 막아도 들려
이용수(87) 할머니는 스스로를 “위안소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망도 가지 못한 겁많은 소녀”로 기억한다.
하지만 20여년 전부터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당당한 인권운동가로 변모했다.
2000년 일본 도쿄 여성국제전범재판, 2007년 미국 하원 등 위안부 참상을 증언하는 자리마다 할머니는 늘 고운 한복 차림이다.
“당당히 알리고 싶은 겁니다. 난 조선의 딸이다. 떳떳한 한국인이다. 그래서 꼭 챙겨 입어요.”

성경책 이옥선 할머니

거만한 자에게는 채찍
부산에서 6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이옥선(88) 할머니는 “공부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의 한 위안소 끌려갔다. 할머니는 공부 못한 한을 달래기 위해 지금도 자주 책을 본다.
특히 구약성서 잠언을 즐겨 읽는다.
‘거만한 자에게는 채찍이 떨어지고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매가 내린다….(잠언 19:29)'
“일본 사람들이 옛날 역사책대로만 살았다면 열다섯 꽃 다운 나이에 끌려가는 일은 없었을 거요. 일본은 대체 언제까지 우릴 외면할 거요?”

화투 박필근 할머니

치매 안 걸릴라꼬 혼자 화투 칩니더
“알려줘서 뭐하는교? 남사스럽구로.” 박필근(88) 할머니는 위안부로 고초를 당한 이야기를 주변에 절대 하지 않는다. 혹시 가족에게 흠이 될까봐서다.
그래도 일본 얘기가 나오면 “우리 고생한 거 말로 다 몬하는데 그놈들(일본)이 눈도 깜짝 안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할머니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남의 집 농사를 도우며 두 남매를 키웠다.
최근엔 혼자 화투치는 걸 즐긴다. 외로워서, 그리고 일본이 사과할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아이들 김복동 할머니

아파도 수요집회 꼭 나가
김복동(89) 할머니는 24년째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할머니는 “일본만 생각하면 365일이 우울한데 딱 하나 집회에서 사람들 만날 때 제일 기쁘다”고 말했다.
열다섯 살에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할머니는 해방 후 고향인 부산에 돌아왔지만 결혼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평생 혼자였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에게 수요집회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더없이 애틋하고 소중하다.

겨울 외투 김복선 할머니

아픔 감싼 따뜻한 외투
김복선(83) 할머니는 열두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러나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건 극도로 꺼린다.
과거 방송에서 피해 사실을 얘기했다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건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선물한 겨울 외투다.
“만날 남한테 옷 팔러 다녔는데, 이거는 내가 백화점 가서 직접 골랐다. 일본이 사과할 때까지 아프고, 치매 걸리면 안 되니까 이거 입고 밖에 많이 댕기야지. ”

보행보조기 이기정 할머니

간호사 시킨다고 해서 갔는데
이기정(90) 할머니는 열다섯살에 싱가폴 위안소로 끌려갔다. 간호사가 되는 줄 알고 갔는데 도착해보니 위안소였다. 할머니는 최근 몇년 새 부쩍 거동이 불편해졌다.
낙상사고로 관절을 크게 다쳐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다. “안 아플 적에는 저놈(보행보조기) 끌고 많이 댕겼는데 인자는 그것도 힘들어.”
바깥 출입이 힘든 할머니는 누구든 찾아오면 “늙은이 좋다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손을 꼭 붙들곤 한다.

김복득 할머니

사과만 받으면 편히 눈 감겠다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김복득(97) 할머니는 스물두 살 되던 해 중국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코 숨지 않았다.
피해 증언도 수차례 했고, 지역 학생들을 돕는데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현재는 통영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할머니를 위로해주는 건 머리맡에 두고 아껴보는 화분이다.
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최고령인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과만 받으면 편히 눈 감겠다”고 말한다.

수양아들 김양주 할머니

50년전 쯤 만난 수양아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김양주(91) 할머니는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갔다.
해방 후 식모살이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할머니는 50년전 쯤 수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아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를 매일 찾아가 돌보고 있다.
할머니는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 참석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바라는 의미로 ‘나비 배지’를 교황에게 건네기도 했다.

반지 박옥선 할머니

자식들을 굶긴게 제일 힘들었다
경남 밀양이 고향인 박옥선(91) 할머니는 열일곱살에 중국으로 끌려가 4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도 60여년간 중국에서 지내다 2001년에야 고국에 돌아왔다.
할머니는 “자식들을 굶긴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일찍 죽고 큰아들도 병으로 잃은 후 남은 자녀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다. 그런 할머니를 위로하는 건 금가락지다.
할머니는 "중국에 있는 아들이 사준 선물”이라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자주 어루만졌다.

함께 피는 꽃

“내가 바로 그 위안부였습니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묻어뒀던 얘기를 꺼냈다. 그전까지 ‘위안부’는 감춰진 역사였다. 김 할머니의 용기로 숨죽여 살아왔던 238명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 증언했다.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24년이 흘렀다. 1200여차례 수요집회, 일본 상대 소송, 국제회의 참석이 있었지만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사이 191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저 편 세상으로 건너갔다. 생존 할머니는 이제 47명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지막 생애를 꽃처럼 피어나게 할 순 없을까. 한국과 일본 대학생 4명이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한·일 대학생들은 “다시는 위안부와 같은 반인륜적인 역사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한·일 청춘세대의 공감은 작은 씨앗이다.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선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들의 공감대가 절실하다. 47명 생존 할머니의 평균 나이는 아흔에 육박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