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논란이 뜨겁다. 지난 번 필자는 6·25 남침 전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역사 인식을 보면서 아래의 가상 스토리가 떠 올랐다.
S시 Y학교의 김승지(金乘知) 선생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교육에 문제점이 많다며 항상 투덜대는 사람이다. 줄곧 고등학생을 가르치다가 이번 학기에는 중3을 가르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중3학생들이 역사과목을 중시하는지, 배운 기본지식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그는 고대사, 중세사 위주로 간단한 시험을 치러보았다.
8월 말, 금방 개학했을 때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다. 100점 만점에 20점에도 못 미친 학생이 수두룩하였다. 김승지는 그중 빵점 맞은 학생 영철을 불렀다. 먼저 그의 거의 백지인 시험지를 내보이며 한참 훈계를 하고 나서, “듣자니 너는 싸움에만 이골이 나고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라던데. 그래서 되겠느냐? 역사를 그렇게도 모르면 어쩌려는 생각이냐”라고 물었다. 김승지 선생의 핀잔에 영철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말이 없다. 김승지는 화제를 돌려 시험문제보다 더 쉬운 현대사의 간단한 다른 한 질문을 던졌다.
“영철학생, 말해봐! 6·25는 누가 먼저 쳤지? 이건 제대로 말할 수 있겠지.” 이 물음에 영철은 멍해서 대답이 없다. “말해보라는데, 6·25 때 누가 먼저 쳤나 말이다!” 한참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던 영철은 “6·25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6·25가 뭐긴 뭐야, 6월 25일이라는 뜻이지.” 김승지의 화가 치밀어 오른 목소리이다.
멍했던 영철은 침묵으로 빠졌다. 자기가 사흘 걸음으로 싸움질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달 전의 일이 기억날 리 없는데, 선생님이 왜 6월에 있었던 일을 묻는지 당황했기 때문이다.
‘6월 말 싸움을 여러 번 하긴 하였는데, 그날이 6월 25일인지, 또 누가 먼저 집적거렸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저가 먼저 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이라고 대답하였다.
김 선생은 너무나 어이없어 영철을 돌려보내고 그의 담임선생을 찾았다. 20대의 여선생이다. “안 선생님, 그 반 영철에게 ‘6·25에 누가 먼저 쳤나’고 물었더니 ‘저가 먼저 치지 않았다.’라고 답하지 않겠소. 한심하기 그지없소. 학부모에게 알려 단단히 교육하여야겠소.”
S시 Y학교의 김승지(金乘知) 선생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교육에 문제점이 많다며 항상 투덜대는 사람이다. 줄곧 고등학생을 가르치다가 이번 학기에는 중3을 가르치라는 임무를 맡았다. 중3학생들이 역사과목을 중시하는지, 배운 기본지식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그는 고대사, 중세사 위주로 간단한 시험을 치러보았다.
8월 말, 금방 개학했을 때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다. 100점 만점에 20점에도 못 미친 학생이 수두룩하였다. 김승지는 그중 빵점 맞은 학생 영철을 불렀다. 먼저 그의 거의 백지인 시험지를 내보이며 한참 훈계를 하고 나서, “듣자니 너는 싸움에만 이골이 나고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라던데. 그래서 되겠느냐? 역사를 그렇게도 모르면 어쩌려는 생각이냐”라고 물었다. 김승지 선생의 핀잔에 영철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말이 없다. 김승지는 화제를 돌려 시험문제보다 더 쉬운 현대사의 간단한 다른 한 질문을 던졌다.
“영철학생, 말해봐! 6·25는 누가 먼저 쳤지? 이건 제대로 말할 수 있겠지.” 이 물음에 영철은 멍해서 대답이 없다. “말해보라는데, 6·25 때 누가 먼저 쳤나 말이다!” 한참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던 영철은 “6·25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6·25가 뭐긴 뭐야, 6월 25일이라는 뜻이지.” 김승지의 화가 치밀어 오른 목소리이다.
멍했던 영철은 침묵으로 빠졌다. 자기가 사흘 걸음으로 싸움질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달 전의 일이 기억날 리 없는데, 선생님이 왜 6월에 있었던 일을 묻는지 당황했기 때문이다.
‘6월 말 싸움을 여러 번 하긴 하였는데, 그날이 6월 25일인지, 또 누가 먼저 집적거렸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로 “저가 먼저 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이라고 대답하였다.
김 선생은 너무나 어이없어 영철을 돌려보내고 그의 담임선생을 찾았다. 20대의 여선생이다. “안 선생님, 그 반 영철에게 ‘6·25에 누가 먼저 쳤나’고 물었더니 ‘저가 먼저 치지 않았다.’라고 답하지 않겠소. 한심하기 그지없소. 학부모에게 알려 단단히 교육하여야겠소.”
- /일러스트=조선일보DB
김 선생은 원로 교원인데다가 성격도 꽤나 날카로우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창피 당하기 일쑤다. 안 선생은 영철 부친에게 전화를 걸고 휴대폰 메시지도 보냈다: ‘영철은 공부는 하지 않고 싸움질만 한다. 6·25에 대해, 말하면서 6월 25일에 자기가 먼저 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여 역사 선생의 핀잔을 받았다. 학부모가 신경을 많이 써 달라.’
영철 아버지는 40대 초반이며 돈을 잘 버는 기업인이다. 항상 바삐 돌아야 하므로 자식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담임선생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고 그는 영철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한바탕 훈계를 하였다. 아들이 자기가 먼저 손대지 않았다고 우기니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영철은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 그날이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라 영철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말로 하지 때리기는 왜 때려?” 어머니는 영철을 감싸며 격분한다. “이놈이 6·25라는 날 다른 학생을 친 모양인데 자기가 안 때렸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겠어?” 아버지가 더 때리려 접어들자 삼촌, 고모, 이모 등이 영철을 에워싸며 “영철아, 빨리 네가 먼저 쳤다고 잘못을 빌어라”라고 달래 영철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빌었다.
이튿날 영철 아버지는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이미 6·25에 먼저 쳤다고 인정하며 빌었다. 그 사이 자식 교육에 등한하여 미안하다. 맞은 자에게 손해배상을 할 터이니 알려 달라’고 말하였다. 안 선생은 이 결과를 역사 선생에게 알렸다. 역사 선생은 더욱 화가 치밀어 교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아뢰면서 ‘우리의 역사교육이 이 지경에 이렀으니 한심하다. 학생과 전 사회가 역사에 문외한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투덜대었다.
글자에 문맹(文盲) 이 있다면 역사에는 ‘역맹(歷盲)’이 있다 하겠다. 역맹을 만들고 안 만들고는 국가의 시책에 속하니 교장이 관할할 바가 못 된다. 교장의 관심사는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 즉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문제이다. 교장은 약 100명이 되는 교원모임에서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라는 물음을 던져보았다. 딱 부러지게 답하는 자는 없고 저마다 제 나름대로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사실 교장 자신도 횡설수설하는 선생들을 반박한 실력이 못 됐다.
김승지 선생의 강력한 제안으로 교장선생은 부득불 이 문제를 S시 교육청에 보고하였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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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비극은 역맹에서 시작한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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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갑
-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한국 한중미래재단 이사장
- E-mail : zhengrj@naver.com
- 1918년에 중국으로 이민 간 동포의 3세다. 1947년 랴..
- 1918년에 중국으로 이민 간 동포의 3세다.
1947년 랴오닝(遼寧)성 푸순시(撫順)시에서 출생한 뒤 베이징대학에서 고전문헌을 전공했다.
1982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고서정리 및 사전편찬 등 업무에 종사하며 편집부장 담당을 지냈다.
1992년부터 칭화(淸華)대학 중문학과에서 객원교수로 종사했다.
중국어와 중국 전통관념·정치문화·사회문제 등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깊으며 신문 및 인터넷사이트 등에 500편 이상의 칼럼을 발표했다.
또 베이징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의 문화고문을 담당하며 여러 차례 강연했다.
중국어발달사와 중국문화사에 관한 논문과 저서 여럿 있다.
현재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과 한국 한중미래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
- 베이징대 고전문헌 전공
- 중화서국(中華書局) 편집부장 담당
<①편에서 계속>
S시 교육감은 이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남침이면 어떻고 북침이면 어떤가?’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김승지 선생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려달라고 수 차례 전화를 하고, 또 이 문제를 심심풀이삼아 내놔 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은 교육청 30여 명의 주요 임원의 회의 끝에 슬쩍 꺼내보았다.
우선 영철 이야기에 장내는 한참 폭소를 자아내었다.
“그건 무지한 아이의 해프닝이고, 자, 여러분! 6·25의 남침, 북침 설에 관해 각자 자기의 견해를 내놓아 보세요.”
교감의 말에 장내는 이내 잠잠해졌다. 어떤 자는 이내 도리질을 하며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자 A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북한에서는 북침이라 하고, 남한에서는 남침이라 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직접 6·25전쟁에 참가해본 자만이 알 일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야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전공한 B는 “남침이라고 간단히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에서 6·25전쟁을 앞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한국이 3·8선 부근에서 북한에 대한 잦은 도발이 있었고, 이것으로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하고 싶은데 핑계가 없으니 3·8선에서 집적거리며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였지요.” B는 자신의 주장에 자신만만했다.
C는 국제 정세를 언급했다. C는 “그런 것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이 김일성을 사주하여 남침한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방국가의 소련에 대한 압력을 동방으로 돌리려는 목적에서였고 모택동은 좋게 말하면 그가 무산계급국제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사회주의진영의 영도권을 쥐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에게 큰 죄가 없습니다.” C는 B 보다 더 의기양양했다.
S시 교육감은 이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6·25전쟁에 누가 먼저 쳤나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남침이면 어떻고 북침이면 어떤가?’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김승지 선생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려달라고 수 차례 전화를 하고, 또 이 문제를 심심풀이삼아 내놔 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은 교육청 30여 명의 주요 임원의 회의 끝에 슬쩍 꺼내보았다.
우선 영철 이야기에 장내는 한참 폭소를 자아내었다.
“그건 무지한 아이의 해프닝이고, 자, 여러분! 6·25의 남침, 북침 설에 관해 각자 자기의 견해를 내놓아 보세요.”
교감의 말에 장내는 이내 잠잠해졌다. 어떤 자는 이내 도리질을 하며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자 A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북한에서는 북침이라 하고, 남한에서는 남침이라 하는데 누구 말을 믿어야 합니까? 직접 6·25전쟁에 참가해본 자만이 알 일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야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전공한 B는 “남침이라고 간단히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에서 6·25전쟁을 앞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한국이 3·8선 부근에서 북한에 대한 잦은 도발이 있었고, 이것으로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하고 싶은데 핑계가 없으니 3·8선에서 집적거리며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였지요.” B는 자신의 주장에 자신만만했다.
C는 국제 정세를 언급했다. C는 “그런 것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이 김일성을 사주하여 남침한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방국가의 소련에 대한 압력을 동방으로 돌리려는 목적에서였고 모택동은 좋게 말하면 그가 무산계급국제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사회주의진영의 영도권을 쥐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에게 큰 죄가 없습니다.” C는 B 보다 더 의기양양했다.
- /일러스트=조선일보DB
종북인 E는 “남침이라 한들 무슨 잘못입니까? 우리가 북침하여 통일했거나 북한이 남침하여 통일했거나 다 좋은 일입니다. 북한의 남침을 통하여 통일했더라면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진정한 우리 겨레의 자주 통일이니 더 좋았을 것이 아닙니까?” E가 원래 하려던 발언 내용은 이보다 더 강했지만, 그때의 분위기를 보아 슬쩍 이 정도로 던져보았다.
“당신 그걸 말이라고 하나? 북한이 통일했으면 한반도가 소련 또는 중국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바로 반박하는 의견이 나왔다. 역시 노골적인 종북은 S시 교육청 안에서는 잘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6·25가 김일성의 반인간적인 남침의 죄행이라는 사실이 발발 당시 이미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게다가 중국 학자 심지화(沈志華·선쯔화)가 다년간 소련의 자료를 발굴하여 쓴 <조선전쟁의 베일을 베끼다>란 책에서 6·25남침은 김일성의 단독 주장이었고 여러 차례의 노력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시켜 발동한 전쟁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에 아까 말한 커밍스 교수도 자기의 이전 견해를 뒤집었습니다. 이 책은 1995년에 출간됐으니 이미 2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한국만 아직 갈팡질팡하며 온갖 횡설수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비극입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에 엄중한 문제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 회의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한 김승지의 발언이다.
회의는 점점 거센 쟁론으로 이어졌다. 이때 교육감이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이만 합시다. 6·25에 관해 각자 의견이 다른 것은 정상적입니다. 한 가지 견해로 통일하면 얼마나 경직될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한 발언은 다 옳을 수도,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철 학생의 ‘내가 먼저 치지 않았다’라는 해답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장내의 폭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의무교육 단계, 초중고교 단계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통일된 교과서로 실사구시의 내용을 제시해야 하고 대학 단계 이상만 연구의 차원에서 각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자이므로 마땅히 실사구시의 역사인식으로 통일하고 그것으로 우리의 후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명철의 예는 절대 해프닝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국민을 역맹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생동한 실례이니까요.”
“김승지 선생님, 됐습니다. 할 말은 많겠지만 오늘은 이만 합시다.”
회의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