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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전라남도 무안읍 주변의 휴지를 줍는 탈북 국군포로 노사홍씨.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기력이 약해 보이는 노씨는 쉼없이 걸었다. 급하게 걸으면서 기자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일까. 잠시 멈춰 선 노씨는 아침에 먹은 것을 전부 토해냈다. 노씨는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휴지를 줍기 시작했다.
휴지를 줍는 노사홍씨는 14번째로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다. 예우를 받아야 할 6·25 참전용사가 어쩌다 휴지를 주워 생계를 잇는 형편이 되었을까. 지난 10월 16일 전라남도 무안에 있는 노씨의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 “별 볼 일 없는 노인을 보러 이 먼 곳까지 왔냐”가 그가 건넨 첫 인사였다.
노씨는 한마디를 하는데도 온 힘을 쥐어짜야 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노씨는 “휴지를 주워야 읍사무소에서 매달 20만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사단법인 물망초에서 매달 지원하는 50만원과 무공명예수당 24만5000원, 노령연급 10만원, 휴지를 주워 얻는 2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기초수급대상 지원금은 원래 32만원이었으나 탈북 정착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삭감됐다. 그는 정부로부터 군입대 후 북한에 억류돼 있었던 47년을 인정받아 3억4000만원에 해당하는 정착지원금을 받았다. 하지만 노씨는 이 돈을 북에 남아 있는 가족 8명을 데려오기 위한 브로커 알선 비용으로 다 써버렸다. 그는 이 돈이 아깝지 않았다. 노씨는 이미 24살 때 중공군의 포로가 되면서 부모, 처자식과 생이별을 했다. 북한에서는 국군포로의 신분으로 살며 자식 넷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연고가 없어진 한국에 왔을 때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이야말로 그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
네 명의 자식을 앞세웠다고 말할 때도 담담하던 그였다. 하지만 24살 때 생이별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가 포로가 된 건 1953년 7월 14일 강원도 금성(현재의 철원)의 한 전호(戰壕) 안에서다. 그는 육군수도사단 1대대 1연대 2중대 위생소대 소속으로 일병 계급이었다. 7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 분개한 중공군이 15개 사단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그는 상관으로부터 3소대로 이동해 방어를 지원하라는 명을 받았다. 저녁 9시 무렵 중공군 기습공격으로 수도군 방어선의 전기가 끊기고 무전도 먹통이 돼 노 일병과 3소대 전우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최후의 일전을 기다렸다. “너희는 포위됐으니 나오라”고 외치는 중공군의 심리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기를 20시간. 다음 날 오후 4시에 굉음과 함께 호가 무너져 내렸다. 수도군이 항복을 안 하자 중공군이 폭탄을 사용한 것이다. 호를 지탱하고 있던 나무 지지대가 노 일병의 허리를 때렸다. 이 사고로 노 일병은 척추 골절과 왼손 중지 절단의 부상을 입었다. 중공군의 포로가 된 노 일병은 평안북도 경원군 탄광이 있는 천마수용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틀 뒤인 7월 16일 국방부는 그를 전사자 처리했다.
북한에서의 47년
- ▲ 탈북 국군포로 노사홍씨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는 다른 국군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증을 받고 새 아내도 얻었다. 그는 불편한 몸이 허락하는 한 어떤 작업도 가리지 않았다. 그래봐야 북한 성인 하루 쌀 배급량 600g에서 100g을 더 받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굶주림과 폭정은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했다. 국군포로라는 꼬리표도 탈북하기 직전까지 그를 괴롭혔다.
노씨는 북한 억류 14년 만에 노동당원으로 뽑힐 정도로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지만 신분은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녀들은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정규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하루는 아버지 때문에 공부도 하지 못한다는 딸의 책망 섞인 말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군인인 처남까지도 가족의 일원이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직위를 해제당하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5남1녀 중 네 아들은 정신병원에서 맞아 죽거나 교육을 받지 못해 험한 일을 하다 죽었다. 병에 걸려 병원에 가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절명한 자식이 가장 가슴에 사무친다. 47년 동안 외로운 노씨의 투쟁은 결국 탈북이란 결론을 내리게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조국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정말 북한에 국군포로가 있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국방부는 노씨가 스스로 북한을 탈출하기 전까지 노씨를 전사처리했을 뿐 아니라 ‘머리에 포탄 파편이 박혀 사망’이라는 허위사실을 기재해 놓았다. 당시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노씨의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돼 같은 해 별세했다. 두 살배기 딸아이도 병으로 죽고 전처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노씨는 국방부가 국가유공자 등록신청에 대해 ‘증거불충분’이라고 결론 내린 것에 대해 원통해 했다. 노씨와 함께 수용소 포로생활을 했던 탈북 국군유공자 고 양회갑씨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은 7년째 바뀌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목포부보훈지청은 지난 9월 18일 노씨에게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결정 통지’를 보냈다. 통지서를 받아든 노씨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조국을 위해 총을 들었고 모든 걸 희생했다. 적국에서 국군포로 신분으로 반세기 동안 살았다. 목숨 건 탈출에 성공했지만 국가에 대한 공헌과 희생에 대한 사실을 인정받기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 줄 그는 미처 몰랐다. 이날 기자가 건넨 어떤 위로의 말도 그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다. 생환한 전쟁영웅의 삭제당한 명예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