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 논설위원11·14 서울 도심 폭력시위, 한상균 위원장의 조계사 도피로 민주노총은 모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노동계의 미래가 달린 노동개혁 논의 장(場)에서는 행적이 묘연하더니, 번외의 이슈로 단숨에 주목을 받은 것이다. 대신 민노총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낸 시간이기도 했다. 철 지난 이념에 갇힌 구호, 쇠파이프를 동원하는 시위 방식, 조계종과의 약속을 예사로 어기는 처신을 지켜보며 남은 기대마저 거둬들였다는 사람이 많다. 1995년 민노총이 출범했을 때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지지기반이 있었다. 민주화 추동세력으로서 정통성을 지녔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계 의제를 앞서 이끌면서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 민노총에는
건강한 개혁
에너지가 안 보인다. 현실과 괴리된 운동 방식을 고집하면서 초심(初心)에 간직했던 덕목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연대의식이다. 노동시장의 약자를 배려하고 연대하는 것이 노동
조합의 핵심 가치다. 한 위원장이 조계사를 나설 때 ‘비정규직 철폐’라고 쓴 머리띠를 둘렀지만, 냉소적인 반응이 주류였다. 몇 달 전 민노총 간부 463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차별 철폐’는 민노총이 가장 실패한 과제로 꼽혔다. 민노총은 대기업·공기업 정규직이 주력인 조직 논리를 넘지 못해 비정규직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만의 고용 보장과 고임금을 위해 전투적 실리주의에 집착하는 동안 비정규직은 늘어났고, 처우도 악화됐다. 민노총 산하 노조가 감원을 피하려고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이용한 사례까지 있다. 민노총이 높이 받드는 ‘전태일 정신’과도 한참 거리가 멀다.
치열했던 시대정신도 오래전에 실종됐다. 노동계를 옹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이미 2004년 민노총 지도부 앞에서 “민주노총의 가장 큰 비극은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수용해볼까 하는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세상은 더 빠른 속도로 핑핑 돌아가는데 그들의 논리·구호·노래·머리띠는 신기하게도 그대로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고비로 기업과 정부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좇았지만, 민노총의 시계는 ‘1987년 체제’에 멈춰 있다.
상급노조의 책무라 할 노동계 싱크탱크 역할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노동개혁 협상에서 민노총이 한 일은 없다. 주역은 한국노총이었다. 기업 혁신으로 고용 형태는 급변하고 있다. 끊임없이 정책을 생산하고 정교한 대응 논리를 개발해야 노동계 전체의 권익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민노총은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식의 저급한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비정규직 존재를 현실로 인정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지금보다 나은 길을 찾는 것이 차선이다. 정규직 조직의 ‘모 아니면 도’ 해법은 무책임하다.
민노총의 노동운동에서 빠진 것이 ‘청년’이다. 시대의 아픔인 청년실업을 두고 민노총은 진지하게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설립 20년이 지나면서 조직이 늙어가는 것과 무관치 않다. 63만 조합원 중 10년 내에 25만 명이 퇴직하지만, 새로 들어오는 청년은 줄고 있다. 젊은 피가 떠난 수구 기득권 조직에는 미래가 없다.
1999년 민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한 후 대화나 타협이란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가 됐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 내부 정파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온건파 주장은 묻힌다. 정치투쟁, 비타협 투쟁으로 이끄는 주력이 조직 내부의 이른바 ‘활동가’들이다. 대중동원 능력이나 여론이 뒷받침해줄 때나 통했던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실리’를 취하려는 일선 노조와 ‘변혁’을 지향하는 상급노조가 겉돌기 일쑤다. 지난 4월 총파업 때 민노총 간판 현대자동차 노조가 ‘억지 파업’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한 배경이다.
이젠 민노총의 존립 근거인 대표성까지 흔들린다. 민노총 지분은 전체 근로자 대비 3%다. 무소속 노조가 늘면서 양대 노총 구도도 흔들린다. 더 심각한 것은 대중의 불신이다. 2010년 당선된 김영훈 민노총 전 위원장은 ‘침몰하는 민주노총’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지금 상황이 바로 그렇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철 지난 독단적 교리를 벗어던지고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해가는 방법 외엔 없다. 파업·투쟁보다 어려운 것이 타협이다. 민노총 내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조합원과 간부들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