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22 16:01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1):견훤과 혜명대사와 은진미륵(上)]
충남 논산을 지날 때면 ‘신병훈련소’가 생각납니다. 수없이 그 부근 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훈련소 근처 ‘견훤왕릉’이라는 표지판을 보기만 하다 마침내 들렀습니다. 행정 주소는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인데 현장을 본 뒤 처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충남 기념물 제26호인 견훤왕릉 주변에는 아무 시설도 없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보면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의 봉분 앞에 ‘後百濟王甄萱陵(후백제 견훤왕릉)’이라는 묘석만 서있습니다.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무덤이 진짜 견훤왕릉인지가 궁금한데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견훤은 걱정을 심하게 하다가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에서 죽었다”는 거지요. 견훤은 자신의 사후, 무덤을 전주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일으킨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망하게 만든 회한 때문이었겠지요. 고려왕조는 견훤의 소원에 따라 완주군과 김제시 사이에 있는 모악산(해발 793m)이 보이는 이곳에 견훤을 묻었다고 하는데 이 무덤에는 전할 ‘전(傳)자’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이 견훤의 무덤같긴한데 정확한 고증은 없다는 뜻이지요.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은진현조에 따르면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는 견훤왕릉입니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甄萱·867~936)은 경북 상주 가은현,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867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꾼이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장군을 칭했다고 합니다. 견훤이 원래 이씨(李氏)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합니다. 견훤이 아기였을 때 어머니가 농사짓는 아자개에게 밥을 갖다주려고 견훤을 나무 아래 뒀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슷한 내용이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등장합니다. “새가 와서 견훤을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도 “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줘 사람들이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남 광주 북촌(北村)의 어느 부잣집에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과 동침하고 새벽이면 사라졌다는거지요. 딸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옷에 몰래 실을 꿴 바늘을 꽂아두거라!” 다음날 아버지가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보니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는 겁니다. 즉 남자의 정체가 지렁이였는데 이후 임신한 딸이 낳은 아들이 견훤이라는 거지요. 한마디로 견훤이 지렁이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을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본 삼국유사의 설화와 연관이 있는 ‘금하굴(金霞窟)’이란 동굴이 있습니다. 장성한 견훤은 이후 군인이 됐는데 역시 삼국사기는 “견훤은 늘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렸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성실함을 인정받은 견훤은 비장(裨將)이 된 뒤 세력을 키워 892년, 즉 진성여왕 6년에 후백제를 건국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거병한지 열흘만에 5000여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하니 군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를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겸 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겸 상주국 겸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 (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긴 벼슬로 칭했습니다.
그의 후백제는 순식간에 강성해져 건국한지 3년만에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가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가 됐습니다. 이것은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는 뜻인데 제가 주목한 부분은 견훤과 미륵신앙의 관계입니다. 즉 그의 통치철학에 대한 것이지요. 우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했고 태봉의 왕이 된 궁예가 미륵신앙에 탐닉한 것은 잘 알지만 견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논산과 익산 일대를 취재한 후 견훤도 불교에 의존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中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