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21 10:06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44):남사고와 격암유록과 십승지(下)]
하지만 남사고의 명운은 부친 남희백의 묘를 정할 때 다하고 맙니다. 그의 부친 묘는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 중턱에 있었는데 남사고는 부친을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의 전설이 그것입니다. 장사를 마치고 보니 묫자리가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툰다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이 아니라 아홉마리의 뱀이 개구리 한마리를 놓고 싸우는 구사쟁와(九蛇爭蛙)의 혈이었다는 겁니다. 남사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후 아홉번을 이장했지만 그래도 명당을 찾을 수 없었지만 열번을 이장(移葬)하면 횡액을 당한다는 풍수지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명당찾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천기를 누설하면 대가 끊기리라는 운학도인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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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의 최후 역시 운학도인과 연결됩니다. 그가 종 6품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교수로 재직하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역서를 읽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운학도인이 문 밖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반가워하는 남사고와 달리 운학도인은 “이제 시간이 다 됐으니 내가 줬던 비서 두권을 거두어가야겠다”며 “천기를 누설한 준비는 돼있느냐”고 힐난합니다. 놀라서 보니 남사고는 꿈을 꾸고있었던 것인데 도인이 준 비결 2권은 서고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음날 관상감정(觀象監正)으로 있던 이번신(李蕃臣)이 “어젯밤 별자리를 살펴보니 태사성(太史星)이 어두워졌다”고 하자 남사고는 “그 별의 운명이 바로 내 명운”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남사고는 사표를 내고 한줄의 시를 남기고 낙향했습니다.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水南山色好 歸計莫樓遲).’ 과연 울진 남수산 자락으로 돌아온 남사고는 사표를 낸지 1년 후인 1571년 6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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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후, 남사고에겐 액운이 찾아왔지요. 생전에 1년 넘게 남사고가 봐둔 묫자리를 파헤치는 땅속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이었습니다. 명당이라고 봐뒀던 장소가 풍수지리에서 제일 기피하는 수맥자리였던 겁니다. 남사고는 다른 자리에 묻혔고 그의 아들 대에서 남사고의 후손은 끊겼습니다.
남사고 선생이 유명해진 것은 그가 남긴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라할만한 선비들의 ‘동서 분당(分黨)’에 대한 것인데 이 이야기는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575년 선생이 이산해를 만났습니다. 남사고는 한양의 서쪽 안산(鞍山)과 동쪽 낙산(駱山)을 가리킨 뒤 말했지요. “조정에서 분당이 있을 것이요. 낙(駱)이란 각(各) 마(馬)로 끝에 가서 헤어지며 안(鞍)은 혁(革) 안(安)이라 개혁 후 편안해지지요.” 말대로 서인은 조선 말기까지 정권의 주류를 이뤘으며 동인은 훗날 대북-소북으로 찢어졌습니다. 남사고는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남산에 올라 “왕기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지리라”라고 되뇌었습니다. 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손없이 사망하고 16세된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집이 사직동에 있었습니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고해 적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전해집니다.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과연 그의 말대로 왜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백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시점에서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으나 그만큼 도력이 높다는 반증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격암선생이 말한 십승지가운데 몇곳을 둘러보겠습니다. 맨먼저 그가 최고의 십승지로 꼽은 풍기 금계촌 입구에는 ‘정감록마을’이라는 돌비석이 서있습니다. 풍기는 제주도처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인데 놀라운 것은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때도 피해를 안봤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비율이 낮아졌지만 한때 주민의 70%가량이 이북출신이라는 점도 기이합니다. 이북사람들이 해방후 공산당의 횡포를 피해 월남할 때 정감록에 나오는 풍기를 찾아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때 이들이 들고온게 베틀과 인삼입니다. 베틀로 시작한게 지금 저 유명한 풍기 인견의 시발점이 됐고 인삼농사로 풍기인삼은 이름을 날리게된 것입니다. 금계촌에서면 뒤로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밭이 많은게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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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마을 가운데 두번째로 꼽히는 봉화는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힙니다. 그중에서도 춘양(春陽)마을 도심촌은 임진왜란 때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피난갔던 곳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겸암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으로 와 아무 피해도 받지않았다는데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안동에서 봉화 춘양마을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않습니다. 저는 울진 취재를 가는 길에 춘양마을을 지나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오지였습니다.
세번째가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 금당실마을입니다. 이 마을 북쪽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현대식 정자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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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얽인 일화도 있습니다. 이여송이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뒷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당실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법조계와 금융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합니다.
충북 보은 속리산은 누구나 한번쯤 가봤을 장소입니다. 이 산은 보은-괴산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지요. 몇가지 설화만 소개하자면 속리산은 고려시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몽진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가던 중 넉달이나 머물렀으며 조선 중기 최고의 명장이라할 임경업장군이 경업대-입석대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도 서려있습니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관기리는 사실 속리산과 거리가 있으며 주변에는 구병산(九屛山·해발 876m)이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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