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
‘내수 위주’ 국내 벤처…“글로벌 시장 빨리 진출해야”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시각 특수효과(VFX) 업체 덱스터의 상장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는 중국 최고 부호로 꼽히는 왕젠린(王健林) 다롄완다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왕쓰충(王思聰) 프로메테우스캐피털 대표이사, IT 대기업 레노버의 계열사이자 중국 내 5위권 벤처캐피털인 레전드캐피털의 리짜칭(李家慶) 이사가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됐다. 프로메테우스캐피털과 레전드캐피털은 덱스터의 2·3대 주주로, 덱스터가 상장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한국까지 온 것이었다.
- ▲ 올해는 LB인베스트먼트 창립 20주년이었다. 사진은 지난 7월 5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열린 창립 20주년 행사.
박 대표는 약 30년간 벤처 투자를 심사해온 베테랑이다. 1988년 벤처캐피털에 처음 입사해 1999~2000년 제1차 벤처붐,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의 등장 등 거대한 산업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투자 활동을 계속해왔다. 2003년 LB인베스트먼트에 합류했으며 현재는 벤처캐피털 부문 대표로서 6500억원의 자산을 굴리고 있다.
LB인베스트먼트는 약 10년째 중국 시장에서 활발히 투자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시장에 진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0년 전 중국의 벤처 시장은 막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선두 벤처캐피털들이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투자해 10배 이상 높은 수익을 내고 있었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도 중국 벤처 시장을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2007년 10월 중국 상하이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해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해외 벤처기업용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유능한 현지 인력을 채용해 현재까지 17개 기업에 총 733억원을 투자했습니다.”
중국 벤처 투자 시장은 외자(外資)가 들어가기 어려운 시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창기 진입 장벽을 어떻게 뚫었습니까.
“중국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는 해외 투자사를 좋은 투자건에 잘 끼워주지 않습니다. 자체 자금도 풍부하기 때문에, 한국 벤처캐피털이 투자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가 중국에 진출하기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이유는 글로벌 기업인 LG가(家) 벤처캐피털이라는 이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LB인베스트라는 이름은 잘 모르더라도 LG는 누구나 아는 회사니까요. 그 덕에 중국 현지의 선두 벤처캐피털들과 친분을 쌓으며 공동 투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중국 회사들과 한국 콘텐츠 업체들을 연결하며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2008년 PP스트림 투자에 참여했을 때는 LB인베스트먼트가 나서서 SBS와 연결해줬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국 투자사들에 인정받게 됐죠.”
일각에서는 중국 벤처 버블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중국 투자 비중이 25%나 되는 LB인베스트먼트 입장에서는 우려가 될 것 같은데요.
“중국 벤처 기업의 버블이 조정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IT 하드웨어 업체 등 많은 벤처 기업들이 수익성, 시장성 검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LB인베스트먼트가 집중하고 있는 모바일 커머스·버티컬 SNS·엔터테인먼트 및 뉴미디어·헬스케어·핀테크 산업은 오히려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또, 벤처 투자 시장이 침체되며 우량 기업에 선별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는 올해도 중국에서 총 5건의 투자를 집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부터 벤처 버블 붕괴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99~2000년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때에 비하면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2000년의 벤처 버블은 닷컴 버블로 비상장 기업들의 가치가 1년 새 수십 배로 폭등해 나타난 부작용이었습니다. 저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스마트폰 시장 확대에 대한 높은 기대로 부분적인 버블이 존재하긴 하나, 과거 IT 버블 붕괴를 경험한 투자자들은 장기간 축적해온 경험을 토대로 벤처 기업들을 철저히 검증하고 있습니다. 몸값이 대체로 높은 바이오 업체들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 이상 개발 경험을 쌓아왔고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와 같은 버블 붕괴를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년간 벤처 투자가 너무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국, 중국의 벤처 기업과 비교할 때 한국 벤처 기업들의 경쟁 여건은 어떻습니까.
“미국과 중국은 개별 국가라기보다는 글로벌 시장입니다. 중국에는 벤처캐피털이 8000개 있으며, 이 중 해외 벤처캐피털만 2000개나 됩니다. 내수 시장 위주로 움직이는 한국 벤처기업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미국, 중국 기업들은 경쟁 환경 자체가 다릅니다. 시장의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들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을 투입하고 경쟁력 있는 인재들을 많이 채용해야 합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글로벌 시장으로 빨리 진출하지 못한다면 ‘IT 강국’이라는 이름도 더 이상 쓰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중국 외에 우리나라 VC들이 진출할 만한 나라는 어디입니까.
“IT 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있는 동남아시아 시장입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은 모바일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자본의 유동성이 큽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는 지대가 해수면보다 낮아 지하철이 없어, 젊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만큼 모바일 시장이 큰 반면, 현지 서비스의 품질은 낮아 한국 벤처 기업이 진출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베트남 역시 한국 서비스에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다만, 벤처캐피털은 엑시트(투자금 회수)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투자해야 하는데 동남아 자본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동남아 시장에 투자한 뒤 홍콩과 싱가포르 등 선진 시장을 통해 엑시트할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
한국 벤처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서 가질 수 있는 우위, 강점은 무엇입니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고속도로에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포르셰’같은 서비스를 잘 만드는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아직 고속도로도 갖추지 않았으며, 자동차 성능도 떨어지죠. 한국 기업들의 고속도로 구축 경험, 자동차 개발 능력을 동남아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활용해야 합니다.”
“투자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산업과 시장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투자자로서의 직관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객관적 지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투자를 받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 중 실제로 투자받는 사람은 몇명이나 됩니까.
“10개 기업의 투자 제안을 받으면 그 중 실제로 투자하는 회사는 1개밖에 안 됩니다. 중국 회사들의 경우 확률이 20분의 1로 더 낮습니다. LB인베스트먼트가 평균적으로 1년에 한국·중국 기업 25개사에 투자하고 있으니, 매년 500건 이상의 투자건을 검토하는 셈이죠. 그래도 한국 벤처캐피털은 이 확률이 그나마 높은 편입니다. 미국에서는 심사역을 만난 업체 가운데 5%만 투자 유치에 성공합니다.”
벤처캐피털이 투자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M&A가 활성화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M&A가 활성화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 같은 선진 시장에서는 벤처 기업이 좋은 제품을 만들면 대기업에서 높은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가격)에 회사를 인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창업가들은 투자금을 회수해 또 다른 회사를 창업하죠. 중국의 M&A 시장 규모도 이미 2014년 1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수백억원대 M&A가 1년에 2000건씩 이뤄지죠.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벤처 기업을 M&A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기업의 입장에서 하청업체를 굳이 M&A할 필요가 없으며, M&A하고 싶어도 재벌들의 독과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 다른 회사를 사면 ‘문어발식 투자’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M&A가 잘 이뤄지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벤처캐피털의 수익률도 낮아집니다.”
약 30년간 꾸준히 고수해온 투자 원칙이 있다면.
“벤처 기업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창업자 그룹이 가장 중요해요. 이 원칙에 충실하면 투자의 성공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마지막으로 투자를 받고자 하는 벤처 창업가들에게 조언한다면.
“투자자를 만나면 30분 내에 감동시켜야 합니다. 한 시간이나 자기 회사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핵심을 전달하지 못하는 창업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초반에 ‘촉’이 오지 않으면 미팅에 집중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창업가가 아닌 투자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업체에 왜 투자해야 하며 자본을 투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뒤, 압축해서 인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 50억 투자한 펄어비스, 내년 상장되면 수익률 15배 기대
- ▲ 펄어비스가 개발한 온라인 게임 ‘검은 사막’
LB인베스트먼트는 1996년 설립된 이래 20년 동안 총 400여개 업체에 투자했다. 이 중 박 대표가 벤처캐피털 부문을 총괄한 후 투자한 업체는 100개가 넘는다.
박 대표가 투자를 심사해 큰 수익을 낸 대표적인 업체로는 게임 ‘검은사막’ 개발사 펄어비스가 있다. LB인베스트먼트는 지난 2014년 펄어비스에 50억원을 투자했는데, 현재 장외 주가 기준으로 12배를 회수할 수 있을 전망이다. 펄어비스가 내년 상장에 성공할 경우 수익률은 15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009년 50억원을 투자한 항공기 부품 업체 하이즈항공 역시 7배의 수익을 가져다줬다. 하이즈항공은 지난해 11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이 외에 시각 특수효과 업체 덱스터(6배), 바이오 신약 개발사 에이티젠(3배) 역시 박 대표의 투자 성공 사례로 꼽힌다.
LB인베스트먼트는 중국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8년 온라인 비디오 스트리밍 업체 PP스트림에 500만달러(약 55억원)를 투자해 2013년 5배를 회수했다. 바이두가 3억6000만달러(약 4000억원)에 PP스트림을 인수한 것이다. 2012년 500만달러(약 55억원)를 투자한 온라인 방송 업체 6룸즈 역시 지난해 중국 엔터테인먼트 업체 숭청옌이(宋城演藝)에 인수되며 4배의 수익을 가져다줬다.
◆ 박기호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국민기술금융 투자심사역(1988~94), 현대전자 정보통신본부 팀장(1995~98), 스틱인베스트먼트 상무(1999~2003), LB인베스트먼트 VC 부문 대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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