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로 34개월 만에 ‘쪽박’ 위기 맞은 통일 대박론
남은 임기 대북 집중력 발휘해 김정은의 핵 야망 저지해야

이 영 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통일전문기자
최순실 사태는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외교·안보와 북한·통일 현안도 예외가 아니다. 불과 두 달 전 5차 북한 핵실험에 대통령과 정부가 총력 대응에 나서고, 국제공조에 동분서주하던 모습은 옛일이 됐다. 추가 핵실험 가능성이 거론되고, 외신이 수일 내에 북한이 무수단(북한명 화성-10호)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쏘아 올릴 것이란 관측을 내놓아도 여론은 무덤덤하다. 대북 추가 제재는 미·중·일 간의 게임이 돼버렸고, 한국의 존재는 실종됐다. 촉각을 세워온 미 대선에 대한 관심도 막판 시들해졌다. 남북관계의 접점도 사라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서로 날 선 공방을 하던 때가 그리울 정도”라고 말한다. 종편 출연과 강연 등으로 부산하던 북한 전문가와 탈북 인사들도 ‘최순실 때문에 장사를 망쳤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다.
이러다간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도 34개월 만에 ‘쪽박’으로 끝날 것이란 비아냥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2014년 신년연설에서 통일 대박을 외쳤다. 그리고 두 달 뒤 독일 드레스덴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을 밝혔다. 그 ‘드레스덴 선언’의 연설문 초안을 최순실씨가 사전에 받아본 정황이 최근 공개되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로 요약되는 박근혜표 대북정책이 신뢰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의혹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북핵 제재 조치의 하나로 지난 2월 개성공단을 전격 폐쇄한 것을 두고 “사실은 배후에 최순실이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공단 재가동을 주장해 온 업체 관계자들과 일부 전문가는 이참에 대정부 반격의 고삐를 당기겠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중요한 건 박근혜 정부 남은 임기 1년 동안의 대북정책과 남북관계 관리다. 최순실 사태로 대통령의 리더십은 사실상 동력을 잃었다. 장관을 구심점으로 한 공직사회는 근(筋)무력증에 걸렸다. 대북전략 집행 과정에서의 부진이나 실책을 궁지에 몰린 대통령에게 떠넘기려는 임기 말 관료조직 특유의 순발력도 스멀스멀 기지개를 켠다. 그동안 국민으로부터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아온 ‘원칙을 지키는 대북 접근’의 장점을 되살려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결기는 찾기 힘들다. 은근히 통일 쪽박을 기대하는 음산한 분위기도 감지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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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DJ) 정부 이후 우리의 대북정책은 진보 세력과 보수 진영이 각각 10년 동안 나눠 맡는 모양새를 보여왔다. DJ·노무현 집권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판했던 이명박(MB)·박근혜 정부 관계자들도 같은 처지에 빠질 공산이 커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를 망친 폐족(廢族)들이 진영 논리에 빠져 서로 사활을 건 진흙탕 싸움을 하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피할 수 없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북핵과 안보는 내팽개친 그들의 지긋지긋한 공성전(攻城戰)은 사라져야 한다.
32세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핵 보유를 통한 50년 집권 플랜을 짜고 있다. 이를 막아내고 남북 통합과 번영의 길로 가느냐, 나락으로 떨어지느냐를 좌우할 절체절명의 시기다. 통일을 향한 막판 집중력이 절실한 때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주술에 빠진 사람처럼 방향을 잃고 있다. 노산(鷺山) 이은상(1903~82)은 그의 시 ‘고지가 바로 저긴데’를 통해 ‘고난의 운명을 지고/역사의 능선을 타고/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고 우리 민족의 숙명을 설파했다. 이 정도로 꼬꾸라질 대한민국이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통일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