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7.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3) [중앙일보] 입력 2017.01.02 00:01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화이트보스 2017. 1. 2. 11:46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7.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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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이 돌아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아전이 찾아왔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가 유희경을 데려갔다. 현감이 잠시 보자고 한다는데 전쟁 때문인 듯했다. 밤늦게 돌아온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 일이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얘기 좀 해보시어요.”

 
유희경은 매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섭사옵니다. 무엇이 대감의 입을 막고 있는지 말을 좀 해보시어요. 저는 괜찮아요.”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왜병의 총칼 아래 백성이 어육이 되고 있다는구나.”
 

그는 친구를 만나러 관아로 갔다가 전쟁에 대한 급박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왜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왔으나 아무 대비도 없던 우리 병사들은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 했다. 부산 앞바다나 해안에서 왜병의 침공을 저지할 단 한 척의 배, 단 한 명의 병사도 없었다니. 봉화대를 지키는 군사도 도망쳐 봉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전쟁 상황을 파발로 받을 정도였다. 파발은 사흘이나 걸려 전황을 제때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재작년에 통신사로 갔다 온 신하들이 주장하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백 년 넘는 전국시대를 거쳐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까지 넘보는 야심가라 했다. 그는 통역을 양성하고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도로, 교통, 읍성들의 위치와 방비태세, 하천과 도강 지점, 조세창의 위치, 전국의 쌀 소출량 같은 정보가 밀정을 통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조선을 먼저 치려는 그의 계획을 통신사들도 알아차렸다. 전쟁을 막아보려는 일본 내 전쟁 반대파와 대마도주는 몰래 사신을 조정에 보내 일본의 실상을 알렸다. 전쟁이 나면 조선과의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마도가 가장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나태한 임금과 당쟁에 빠진 신하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유희경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수소문한 새로운 이야기가 모아질수록 매창에게는 불리한 내용뿐이었다.
 
“한시바삐 떠나야겠다. 경상도를 일주일 만에 도륙하고 충청도까지 쳐들어갔다는데 한양이 먹히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한다. 여기선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양으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벌써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소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매창은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가져오는 소식은 더욱 암담한 내용이었다. 전쟁이 나면 앞장서서 싸워 향토와 백성을 보호해야 할 지방 수령들이 재산을 챙겨 가솔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을 본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고 분개했다. 왜군이 가진 세 가지 무기는 조총과 창칼,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돌진하는 용맹성이라고 했다. 활이 주무기인 우리 군과는 애초에 적수가 되지 않았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왜군들은 오만한 태도로 부르짖었다.
 
“싸움을 원하면 싸우고, 싸움을 원치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열라.”
 
조선군은 “죽기는 쉽고 길을 열기는 어렵다”며 맞섰지만 아무 힘도 실리지 않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유희경은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진작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전쟁에 대비하자는 신하들의 말을 서인의 주장이라고 무조건 반대한 동인이나 우유부단한 임금을 대놓고 원망했다. 그가 얘기하는 나라의 운명은 매창에게 일본군과 똑같은 적이었다.
매창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었다. 가슴을 옥죄는 이별의 공포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유희경은 매창의 속내는 모르고 그녀의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사실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 삐걱거림의 이유와 내용을 서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잘 아는 일이지만 입에 담아 바깥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 참혹한 절망의 얼굴임을 매창은 알았다.
 
“가시어요. 가시려거든 빨리 가시어요. 가신다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신단 말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오열하고 말았다. 유희경은 한참을 앉아 있다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서 있다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밤이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매창은 자신이 한 모든 말, 모든 행동을 후회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자신이 미웠다.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던가. 삼경이 지나 그녀는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아 편지를 쓴다. 촛불은 오늘따라 더 희미했다. 눈이 침침해진 건가. 그녀는 눈을 자꾸 비볐다. 편지를 단번에 써 내려 가지 못했다. 할 말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편지는 두서가 없었다. 고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그러는 편이 나았다. 붓을 내려놓을 때쯤 문밖은 희붐하게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꿈을 꾸었어요. 요즘은 눈만 감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꿈이 찾아옵니다.
여름인가 봅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자지러지고 냇가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빨래를 하는 제가 보입니다.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흰 빨래는 빨아도 빨아도 새하얘지지 않고 날은 저물어만 가요. 저는 당신의 젖은 두루마기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빨래를 하고 있는 제 곁으로 집채만 한 황소 한 마리가 지나갑니다. 황소 머리에는 화관이 씌어 있어요. 저는 빨래를 손에 들고 소를 쳐다보았습니다. 어쩐지 당신을 닮은 것 같은 황소의 큰 눈을 바라보다가, 무엇인가를 묻듯이 깊숙이 들여다보다가 잠에서 깼어요.
오래 울다 잠든 아이처럼 저는 어깨를 들썩입니다. 당신과 연관이 있는 꿈은 무엇이든 깨고 나면 슬퍼요. 당신이 전쟁터로 가야 한다니 꿈조차 이리 심란한가 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라고 의병이든 군졸이든 나는 내 몫을 하겠노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화관을 쓴 당신 모습은 눈이 부시게 환했으니까요.
부디 당신 몸을 귀히 보전하시길 애원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대지 말고 당신의 시재(詩才)를 부인하려는 세상과, 재능에 마땅한 신분을 받지 못한 애꿎은 운명을 원망하세요. 제발, 당신을 상하게 할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저에게 화를 내고 발길질을 하는 편이 덜 가슴 저밀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고달픈 목숨 견디기 힘들어 스스로를 상처 낸다고 생각하면 등뼈 하나가 뽑히는 것처럼 아픕니다.
십 리나 간다는 난향처럼, 천 리나 간다는 시향처럼 거문고 소리가 먼 곳의 당신께 당도하기를 기원하면서 손가락을 튕기렵니다. 귀한 당신, 고이고이 몸 살피시어 무사히 돌아오기 바랍니다.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 오늘은 거문고도 오래 타지 못할성싶습니다. 술대로 줄을 힘껏 내리쳐서 내는 대점(大點)의 장중한 소리를 당신은 좋아하셨지요? 술대를 내려놓고 당신인 듯 거문고를 자꾸만 어루만집니다. 엊그제 당신이 거문고 타는 제 손을 오래 붙잡고 어루만졌듯이 그리 한참이나 거문고를 쓰다듬습니다.
당신이 곁에 없을 때면 제 마음은 이토록 정처 없이 세상을 쓸고 다닙니다. 끝 간 데 없는 이 마음 당신 옷고름에 매어두고 싶습니다.
매창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상명지척(喪明之慽)이라는 말의 무게와 부피를 몸으로 배운다. 너무 슬퍼하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의 얘기를 제 아픔만 아픔인 줄 아는 사람의 과장법으로만 이해했었다. 차라리 눈이 멀어버려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자학이었으리라.
머릿속에 맑은 물 한 사발이 둥그렇게 자리 잡는다.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맑은 물을 바라본다. 새벽이다. 컴컴한 하늘에 아직 해의 기운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절을 하지 않는다. 정화수 한 사발을 기도도 안 올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차갑고 맑은 물이 밥의 길을 따라 뱃속으로 흘러갔다. 그 시린 기운에 눈을 감고 이를 앙다물었다. 물이란 대저 이렇게 쓰이는 것이지. 화톳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가슴을 숯덩이 식히듯 찬물을 끼얹어 식히는 거야. 상상 속에서조차 그녀는 자신에게 허튼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에는 독이 있다. 달콤하다고 손을 내밀었다가는 눈만 머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된다.
해시가 다 되어가는 한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시간에 관아의 통인이 편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유희경이 보낸 것이다. 매창은 허술한 옷차림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달려나가 편지를 낚아챘다. 문도 닫지 않고 선 자리에서 편지를 읽었다.
 
매창아!
 
네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네 손바닥에, 네 가슴에 약조를 새길 수 없는 내가 밉다.
너도 알다시피 온 나라에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너와의 만남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내가 여기 눌러앉아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랏일을 핑계로 떠나는 내 발걸음을 너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비겁하게 이런 변명의 말을 늘어놓다니 이 부끄러움을 어찌할꼬. 너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목숨 받고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너로서 충분하다. 내 인생은 너로서 다 채워졌느니라. 그러니 너도 작별을 너무 안타까워 말고 네 살길을 도모하여라. 매화나무도 새들도 제 목숨 지키느라 저토록 분주한 것이다. 모름지기 생명이란 자기 것을 가장 위쪽에 놓는 것이 본성이고 상정이다. 너는 그 순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늙은 몸이 되었다. 낼모레면 지천명이다. 기쁨이 기쁨인 줄도 모르고, 슬픔이 슬픔인 줄도 모르고, 아픔이 아픔인 줄도 모른다. 늘 그곳에 붙박인 듯 숨죽이고 있는 것이 내 부박한 삶이려니 내 몸의 길이려니 모든 걸 받아들이고 어느 때부턴가 꿈조차 꾸지 않는다. 너를 만난 뒤로 망년지회(忘年之會)의 감격에 내 처지를 잠시 잊었다만 어찌 진실로 나이까지 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전쟁터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여기 앉아서 너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섭다. 살아 돌아올지 죽어 시신으로 돌아올지 알 길이 없으나 전쟁터에서는 비겁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이 내가 탐할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나를 기다리며 애태우지 마라. 새봄이 오면 너는 새잎을 달고 너로서 푸르르면 될 일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너의 안녕을 기원하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원한은 아무리 강해도 뭉쳐지지 않는다.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이면 금세 녹아내린다. 매창은 유희경이 부러 아픈 말을 하고 있음을, 훗날 그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미리 단련시키고 있음을, 그 안간힘을 글자들 사이에서 읽었다. 그 안타까움이 어떤 사랑의 몸짓보다 뜨겁고 아팠다.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유희경의 앞날을 생각하고 자신의 갈 길을 생각하는 밤은 길었다.
들려오는 소식은 갈수록 암암했다. 왜군들이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계속 북진 중이라고 했다. 허둥대다 험준한 천애요새인 조령을 왜군에게 넘긴 조선은 병법의 기본조차 모르는 오합지졸이었다.
 
“한양이 도륙당하는 데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니 이것이 나라인가.”
 
유희경은 피를 토하듯 한탄했다. 조정은 급히 병사를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고 부대를 만들었다. 아직 부안을 비롯한 호남지방은 무사했다. 반역의 땅이라고 욕을 먹던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유희경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안절부절못함이 두렵다. 나의 적은 그의 의기. 왜군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강적이다.’
 

매창은 그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가 힘에 부쳤다.
 
“하루도 더 지체할 수가 없구나. 사대부만 백성인 것이 아니니 나도 뭐라도 해야지. 화살 하나라도 날라야 하지 않겠느냐? 나라가 없는데 어찌 백성이 있을 수 있겠느냐? 어서 한양에 올라가 봐야겠다. 식솔들은 어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희경의 다급한 말속에는 매창이 없었다. 사대부라는 말에도, 한양이라는 말에도, 식솔이라는 말에도 매창이 거할 곳이 없었다. 눈물이 쏟아질 듯 매창의 눈동자에 물이 가득 차서 찰랑거렸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극락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백번 옳은 말이고 사내대장부다운 말이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옳은 말의 가혹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감정을 내세워 대적하기에 상대는 너무 큰 적이었다.
 

DA 300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출처: 중앙일보] [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7.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