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던 내 망명 어찌 알았나”
기자에게 특종 보도한 경위 물어
런던서 안내했던 김정철엔 함구
‘김정은에게 경고 메시지’ 해석
그가 망명길 세운 뜻 ‘북한 민주화’
우리 사회가 계속 돕고 성원을
서울 도착 후 어떤 휴대전화를 장만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푸른색 폰케이스를 내놓고는 “맞혀 보라”고 했다. ‘갤럭시 노트5 같은데요’라는 말에 태 전 공사는 “정답입니다”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경직된 얼굴로 북한 체제를 강변하던 여느 북한 외교관의 스타일과는 차이가 났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외래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쓰는 말투다. “김정은이 베팅할 수 있는 건 그것(핵)밖에 없다”거나 “이 세상에 퍼펙트한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말이 술술 나왔다. “영국에서 제가 프레스 담당이었다”고 말하고는 “한국에서는 이를 홍보라고 하는가요?”라며 되묻기도 했다. ‘시스템’이란 단어는 여러 차례 되풀이됐고 “지난 시기엔 인터넷도 PC가 있어야 했지만 이젠 스마트폰 앱으로도 가능하지 않으냐”는 말도 했다.
영국에 체류할 때 그는 유창한 영어로 김정은 정권을 대변하거나 방어하는 역할을 했고 그 영상은 유튜브 등에 여러 편 올라 있다. 탈북·망명이 세계적 뉴스가 된 데는 그가 런던 외교가나 BBC 등 외신기자 사이에 꽤나 알려진 인사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영어를 그리 잘할 수 있게 됐느냐’고 묻자 태 전 공사는 “중학교 시절 중국의 국제학교에 유학했다”고 털어놨다.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도 구사한다는 것.
서울 생활 6개월을 넘겼지만 대부분 관계당국 조사와 안가(安家) 체류로 보냈다. 사회에 나온 게 지난해 11월 말이니 남한 사회를 직접 접한 건 달포 정도다. 그런데도 한국산 제품 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듯 흘러나왔다. ‘소주를 좋아한다’가 아니라 “참이슬”이라고 꼭 집어 말하고, 북한 상류층에서 인기가 좋다는 한국 화장품 ‘설화수’도 거론했다. 그는 ‘짝퉁’이란 단어에도 익숙했다. 런던에서 LG 휴대전화를 통해 서울발 뉴스와 문화 콘텐트를 접했다는 그는 남북한의 언어 차이도 또렷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전기밥솥 얘기를 하다가는 “북한 말로 밥가마인데 여기서는 뭐죠”라며 확인할 정도였다.
태 전 공사는 서방에 파견된 외교관 중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한 편이다. 하지만 극도로 통제된 북한 체제에서 체득된 긴장감을 노출하기도 했다. 인터뷰룸 밖에 사람이 오갈 땐 잠시 멈칫했고, 경호원의 움직임에 동공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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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전 공사는 2일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처음 출근해 시무식을 치렀다. 이곳에 먼저 자리 잡은 10여 명의 탈북 엘리트 인사들과 만나 의기투합했다. 앞으로 외신회견이나 서방 국가 방문을 통해 김정은 정권의 핵 야욕과 인권 유린상을 국제사회에 폭로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태 전 공사의 폭발력은 커질 수 있다. 김정은 체제의 아킬레스건을 겨냥할 최전방 공격수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태 전 공사는 “제 혀끝을 어떻게 놀리는가에 따라 북한에 있는 많은 분들이 다치게 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지난해 5월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36)이 런던을 방문했을 때 태 전 공사는 밀착 안내를 맡았다. 그렇지만 김정철의 호르몬계 질환설이나 김씨 일가의 내밀한 정보 등에는 일단 함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태 전 공사가 ‘여차하면 민감한 내용을 폭로할 것’이란 경고 메시지를 김정은에게 보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제 남은 건 태 전 공사가 탈북·망명을 결행하며 세운 ‘북한 민주화’란 뜻을 우리 사회가 일관성 있게 성원하는 일이다. 대북 햇볕정책 성과에 집착한 정부에 억눌려 쓸쓸히 숨져간 비운의 망명객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한 분이면 족하다.
글=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