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5.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화이트보스 2017. 2. 27. 15:12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5.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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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책 속에 묻혀 늙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거늘 이제 그걸 바꿔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그깟 책이 매창의 거문고 소리를 따라오겠느냐?”
 
허균은 매창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두 분께서는 중국까지 다녀오신 견문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분들이시온데 그런 말씀은 저를 놀리는 말밖에 안 되옵니다. 이 골방에서 거문고로 세월을 죽이며 사는 제가 무얼 제대로 배웠겠사옵니까? 오늘 두 분의 가르침을 잘 받잡겠사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역관은 많은 사람에게 지식의 전달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자신의 지식욕을 채워줄 수 있는 책을 역관에게서 사들였다. 서양의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은 대부분 금서목록에 올라 있어 값이 비쌌다. 신 앞에 남녀노소,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는 진리를 전파한다는 서양의 종교를 맨 처음 퍼뜨린 사람도 역관들이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는 눈 밝고 귀 밝은 그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허허, 이보게 매창의 말을 들었는가? 나는 누굴 가르칠 깜냥이 아니니 자네가 맡게나.”
 
“그렇다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요. 무얼 가르치는지야 제 마음 아니겠습니까?”
 
“자네 또 그 육담을 시작할 셈인가? 관두게.”
 
“농담입니다. 중국에 가서 아무리 귀한 물건, 큰 세상을 보면 뭘 합니까? 이리 고운 여인의 애잔한 곡조가 그리워서 잠을 못 이룬답니다. 매창아, 네 소리를 들었으니 이번엔 내가 노래 하나 불러도 괜찮겠느냐?”
 
김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농염하고 간드러진 곡을 중국어로 한 가락 뽑았다. 술기운으로 붉어진 그의 목울대가 올록볼록 꿈틀거렸다. 어깨춤을 추며 발끝을 세웠다 뒤꿈치를 내렸다 하면서 보폭을 앞뒤로 떼어놓았다. 그의 몸은 제 흥에 겨워 저절로 움직였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매창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춤추기를 권했다.
 
“쇤네는 그저 어르신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만 싶습니다. 괜히 멋들어진 춤 망칠까 두렵사와요.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옵니다. 나으리도 음악을 제대로 즐길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가락을 몸으로 느끼는 남정네는 드물답니다. 역관 어르신은 몸의 일을 두루 꿰고 계시니 여자의 마음도 잘 살펴주실 것 같사옵니다.”
 
매창의 추어주는 말에 김성운은 반색하며 기뻐했다.
 
“허허, 그러하냐? 네 말대로 곧 어여쁜 여인이 나타나 함께 춤을 추었으면 좋겠구나.”
 
“머지않아 꼭 그런 날이 올 것이옵니다.”
 
모르긴 몰라도 김성운을 따르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역관은 대개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 품격 있는 관원인 동시에 양국을 오가는 공인 무역상이었다. 유창한 외국어실력,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는 감각, 세련된 태도와 유려한 대화술에다가 상대국 고위관리와 소통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까지 필요했다. 역관으로서 필요한 능력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바라는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자네를 위해 좋은 여인이 어디 있나 알아봄세.”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참, 교산 대감! 혹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대추 얘기를 들어보셨는지요?”
 
김성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추야 원래 과실 중의 으뜸인데 특별히 더 맛있는 대추가 있던가? 매창아! 너는 뭐 아는 얘기가 있느냐?”
 
“저도 금시초문이옵니다.”
 
“잘 됐다. 그럼 오늘 내가 너에게 한 수 가르쳐주마. 이건 황제내경에 나오는 비법이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허균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책을 들먹이는 걸 보니 또 실없는 소리를 하려는 게로구먼.”
 
허균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성운은 선심 써서 비밀 하나 가르쳐준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주의 원리요, 음양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보시지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짐작하듯이 둘은 연모하는 사이였답니다. 밤과 낮을 안 가리고 사랑을 불태우니 그 남자 몸이 배겨나질 않았지요. 그때 여자가 누구한테 전해 들었다며 자기가 남자의 기를 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귀가 솔깃해져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허균과 매창이 동시에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빨리 얘기하게. 그게 무언가?”
 
“여자는 광에서 말린 대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그중 가장 실한 놈을 꺼내 남자 앞에 내밀었죠. 남자는 실소를 하면서 그깟 대추 한 알이 무슨 약이 되겠느냐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겠지요. 좀 전의 대감처럼요. 그때 여자가 갑자기 옷을 벗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벗은 몸을 보자 다시 양물이 불끈 섰습니다. 그때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보란 듯이 아까 그 대추를 집어다가 자신의 옥문 안에다 집어넣었지요.”
 
“예끼 이 사람아, 내 이럴 줄 알았어. 자네는 어찌 그리 요상한 얘기만 어디서 주워오는가? 뭐가 나오나 했더니 결국 또 그 얘긴가.”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정말 황제내경이 가르쳐주는 비방이라니까요. 더 들어보세요. 본론은 지금부터니까. 여자가 남자에게 일렀습니다. 이 대추를 안에다 품고 사나흘을 보냅니다. 그러면 여체에서는 남자의 씨앗이 잉태된 줄 알고 가장 좋은 양분을 그 대추에 집중적으로 공급해준답니다. 마치 아이를 키우듯이요. 그러고 나서 꺼내보면 대추는 주름이 다 펴지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지요. 그때 대추를 먹으면 그보다 좋은 명약은 없다 합니다.”
 
“자네 나를 바보로 아는가? 그건 대추 때문이 아니지. 여자가 대추를 품고 있던 사나흘 동안 남자가 방사를 하지 않고 기다렸으니 자연히 기가 차오르게 된 것이지. 자네 그런 이치도 모르나? 아무것도 아닌 얘기 갖고 떠벌리기는.”
 
“질러가나 돌아가나 길만 잘 찾아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안 그러냐, 매창아?”
 
매창은 평소에 만나는 사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김성운에게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넓은 세상을 보고 온 사람답게 성품이 호방하고 말과 행동이 컸다. 허균이 그를 벗 삼아 동행해서 다니는 이유를 알고도 남았다. 김성운은 자신이 보고 온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고 싶을 것이다. 그는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고 허균은 자신이 겪지 않은 세상의 얘기를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니 좋은 벗이 될 조건으로 충분했다. 허균 또한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으니 대화의 맞수가 될 만했다. 그들의 교류는 자연스러웠다.
 
 
 
술잔이 서너 순배 돌고 취흥이 도도해지자 허균이 또 한 번 매창의 소리를 청했다. 매창은 좌중을 둘러보며 각 사람과 눈을 맞추고 동의를 구하듯 시간을 끌었다. 오른 무릎을 세워 두 손을 얹은 다음 목을 길게 빼고 침을 삼켰다.
 
“어허허허허, 어어어어허허어.”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음을 고르고 목청을 가다듬는 구음을 뱉어냈다. 목울대를 움직여 고음과 저음의 자리를 찾느라 소리들이 숯에서 불똥이 튀듯 불규칙하게 자리다툼을 했다. 이윽고 구슬주머니에서 붉은 구슬이 쏟아지듯 흘러나온 소리가 방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매창은 목을 지나 입술을 거쳐 나온 소리를 명주실마냥 뽑아냈다. 허균은 흐뭇한 표정으로 매창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고 좌장 노릇을 하며 나서는 것이 그의 버릇이지만 매창의 노래에 기세가 눌려 말을 잃은 사람 같았다. 숨을 몰아쉬고 침 삼키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매창의 목소리는 멀리 신선이 산다는 삼청에서 들려올 법한 청아한 소리였다. 울고 싶은 사람을 울게 만들고 웃고 싶은 사람을 웃게 만든다는 신묘한 여운이 깃들어 있었다. 가슴을 후비는 애상 어린 목소리이다가도 가벼이 곡조를 타넘으며 매끄럽게 넘어갈 때는 햇솜같이 보드라웠다. 다시 굽이칠 때는 홍수 때의 계곡물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허균은 반쯤 열어놓은 문밖을 내다보았다. 어느 결에 바깥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회화나무 끝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마당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회화나무는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히는 나무다. 장사하는 사람이 집 앞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손님이 들끓게 되고 공부하는 사람의 집 앞에 심으면 문리가 트인다 믿었다. 번창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문 앞에 회화나무가 있고, 반대로 집안이 갑자기 몰락하는 일이 생길 때는 회화나무가 말라 죽었거나 베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잎이 반들거릴 정도로 잘 가꾸었는데도 매창의 집에 부귀의 기미는 없었다. 저녁이 가까워오는지 사위가 어둑해졌다.
 
“비가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건 좋은데 네 거문고 소리를 맑게 들을 수가 없는 것이 한이로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더냐?”
 
“스물아홉이옵니다.”
 
“나보다 네 살 적구나. 그만하면 나와 벗 삼을 만하다. 내 누이는 너보다 열 살이 많았는데 지금 네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너를 보고 있으니 누이 생각이 나서 가슴에 모진 바람이 이는구나. 이런 날 부슬비까지 오니 술맛이 더욱 그윽하다.”
 
봄날 열어놓은 방문으로 들이치는 봄바람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신록 같은 풋풋한 기운이 심장에 새 피가 돌도록 몸을 부추겼다. 두 남자가 대화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매창은 배경음으로 이 곡 저 곡 거문고를 연주했다. 그녀는 말을 할 때보다 거문고를 탈 때 더 편안해 보였다. 어둑한 마당에 비치는 그믐달만큼이나 가녀린 곡조를 끝마쳤다. 빗발은 서서히 잦아들고 처마에 맺힌 빗방울이 툭툭 성글게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대감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쇤네 또한 마음이 편안합니다. 오래 사귄 친구를 만난 것 같사옵니다.”
 
“친구 좋지, 친구 좋아. 남은 밤은 그보다 더 친해져야 하느니라, 꼭 그렇게 하자, 우리.”
 
허균은 부러 의뭉한 눈빛을 하고 그녀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어느새 사방이 깜깜해졌다. 매창은 윤금이에게 술상을 물리게 하였다. 술과 시가 서로를 넘나드는 흥건한 술자리가 늦은 밤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 김성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매창아, 오늘 오랜만에 시름 잊고 아주 잘 놀다 간다. 교산 대감, 저는 이만 갈 것이니 남은 오늘 밤 제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만큼 즐기시기 바랍니다.”
 
매창은 손사래를 치며 김성운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옵니다. 저도 이제 그만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물러가도 비단금침 펼칠 사람은 보낼 것이오니 교산 대감은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어요. 그러니 역관 어르신도 조금만 더 계시다 함께 자리를 파하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아니, 왜들 이러느냐? 벌써들 간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이 있느냐? 김 역관은 그렇다 쳐도 너는 좀 더 있다가 일어나거라.”
 
“연일 격무에 고단하시고 어제는 늦도록 과음을 하셨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먼 길에 고단하실 터이니 오늘은 일찍 단잠 주무시어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이부자리 봐 드리겠습니다.”
 
매창이 나가고 얼마 후 허균의 침소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곱게 단장한 여인은 오늘 대감의 잠자리를 봐 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왔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매창의 심중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귀에게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어쨌거나 이귀의 정인이고 이귀는 그의 지기인데 아무리 자신이 파락호라 하여도 조심성 없이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균은 귀한 것은 귀한대로 천한 것은 천한대로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기로 유명한 허균이었지만 이후로도 매창에게 잠자리를 채근하는 일은 없었다.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기엔 아까운 인물이고, 아까운 재주로고. 내 평생 너 같은 여인을 곁에 둔다면 그것은 내 인생의 지복일 것이다. 너는 나의 하룻밤 여자가 아니라 심복지우이니라.’


DA 300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출처: 중앙일보] [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5.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