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45
- 더보기
입력 : 2017.04.27 03:16
영국인들이 "가장 위대한 순간(finest hour)"이라고 말하는 역사가 있다. 1940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독일군 공습으로 영국 도시 곳곳이 불바다가 됐을 때다. 런던에서만 3만명이 죽고 5만명이 부상당했다. 런던 시민 6분의 1인 140만명이 집을 잃었다. 처참했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왜 반대로 말할까.
▶폴 콜리어 등이 쓴 '제2차 세계대전'은 런던 대공습에 대한 서술을 18세 영국 청년이 당시 쓴 일기로 대신한다. 청년은 거리에 쌓여가는 시신을 보면서 이렇게 썼다. '나치가 저지른 이 끔찍한 범죄 현장보다 훨씬 높은 저곳엔 뜨겁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시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영국 국민의 의지다. 이 정신으로 우리는 결국 이길 것이다.' 이 청년은 군에 자원해 전쟁터로 갔다.

▶프랑스가 굴복하고 미국은 외면할 때였다. 영국에 승산은 희미했다. 대공습이 시작된 뒤 11주 동안 런던에 폭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은 하루에 불과했다. 나치가 노린 건 영국인들 마음의 구멍이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이 정부에 항복하라며 폭동을 일으키길 기대했다. 프랑스에선 그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을 잘못 알았다. "(내가 여러분께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처칠 총리의 호소에 국민은 "런던은 견딜 수 있다(London can take it)"고 답했다.
▶그제 서울 일대에 비행기 굉음이 울렸다. "북한 전투기 아니냐?" "전쟁 난 거 아니냐?"는 전화가 경찰, 구청, 국방부에 수백 통 걸려 왔다고 한다. 주말 에어쇼를 준비하는 비행팀의 훈련을 오해해 일어난 소동이었다. 그러자 주최 측이 향후 훈련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해도 무덤덤한 시민들이 비행기 몇 대에 놀란 이유는 무엇일까. '위기 불감증'과 '전쟁 공포증'은 동전의 양면인가.
▶영국인들이 런던 대공습을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부르는 건 살육과 파괴, 비참과 공포를 이겨낸 공동체의 정신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이를 '블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