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윤동주 탄생 100주년]<7> ‘윤동주의 고향’ 중국 용정 ‘이방인’ 서글픔만 … 따뜻한 고향 그리워라 2017년 07월 24일(월) 00:00확대축소 중국 용

화이트보스 2017. 7. 24. 10:29

윤동주 탄생 100주년]<7> ‘윤동주의 고향’ 중국 용정

‘이방인’ 서글픔만 … 따뜻한 고향 그리워라

2017년 07월 24일(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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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용정에 자리한 명동촌은 윤동주가 태어난 고향이다. 구한말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용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거나 근대교육 활동을 펼쳤다. 〈사진=시산맥 제공〉
윤동주가 태어난 용정 명동촌은 벽촌이다. 용정시에서 떨어진 외진 시골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 뻗은 장백산맥과 여기에서 분기된 산들이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마을 주위에는 고산준령이 에워싸고 있다. 

윤동주의 집안이 이곳에 이주한 것은 증조부 윤재옥 때였다.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러다 1900년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다시 명동촌으로 옮긴 것으로 돼 있다.

윤동주는 이곳에서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다.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 교원이었고 조부 윤하현은 명동교회 장로였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동주의 아명은 해환(海煥)이었다. “바다처럼 빛나게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아명은 운명처럼, 아니 순교와도 같은 죽음으로써 오늘의 세상에 빛을 던져주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해환’(海煥)은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明東)이라는 지명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명동은 일찍이 조선인들이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이들은 ‘동쪽에 있는 조선을 밝게 하자’는 뜻으로 지었다. 비록 사정상 북간도로 이주했지만, 조국에 빛이 되는 삶을 살자는 의미를 새기고 살았다. 

당시 조선인들이 북간도로 이주한 것은 일제의 수탈을 피하거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북간도는 한반도와 중국 영토 사이에 있는 강 유역이었다. 그 사이에 있다 하여 사잇섬(간도·間島)으로 불렸는데,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에 기근이 심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1976년) 

시인의 동생 윤일주가 묘사한 집 근처 모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윤동주의 집은 마을에서도 눈에 띄는 기와집이었다. 큰 기와집과 넓은 집터는 일반적인 시인들의 생가와는 다른 이미지를 주었다. 형편이 어려운 빈한한 집안일 거라는 선입관을 깨뜨렸다. 

최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산맥’과 함께한 문학기행을 다녀온 바 있다. 현장에서 본 윤동주의 집은 제법 ‘밥숟가락’을 뜨는 집안이었다. 커다란 대문과 깊은 우물, 집 주변의 나무들은 그저 그런 농촌의 집이 아닌, 웬만큼 사는 집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윤동주의 조부는 북간도로 이주를 해 제법 많은 농경지를 개간했다고 합니다. 명동 지역에서 쌀농사를 짓는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근면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장남이었던 윤동주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와 무관치 않았겠지요”

동행한 김필영 시산맥 시인협회장의 설명이다. 전 회장은 “듣기로 윤동주 시인은 소학교 때부터 어린이 문예잡지를 보며 문학의 꿈을 꾸었다”고 덧붙였다.

2012년 복원된 생가는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2014년 표지석이 세워졌는데 새겨진 글씨가 아프게 다가온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中國 朝鮮族 愛國詩人 尹東柱 故居’. 다장된 생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중국’의 분위기가 배어 나왔다. ‘한국의 시인’ 보다는 ‘중국 조선족 시인’의 집을 떠올리게 했다. 윤동주는 죽어서도 ‘독립된 조국’의 시인이 아닌, 여전히 이역만리를 떠도는 ‘이방인의 시인’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1936년 1월 6일· ‘윤동주 전집’ 수록)

어찌 보면 윤동주는 생애 자체가 떠돌이의 삶이었다. 그의 시 ‘고향집’은 용정 은진중학교에 다니다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떠돌이의 심상, 유랑의 서글픔이 배어 있다. 디아스포라로 대변되는 이주민으로서의 슬픔은 오랫동안 그의 내면에 침윤돼 있었을 것이다.

생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한다. 여름 한낮의 적요는 깊고 쓸쓸하다. 그가 마셨을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흐릿한 물그림자가 비친다. 그도 이곳에 앉아 여름의 한때를 보냈겠지. 개방이 된 방안으로 들어서자 손때 묻은 오래된 살림살이가 보인다. 그와 그의 가족이 거처했을 방과 부엌은 바로 지금 실재하는 명징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집을 나와 윤동주가 묻힌 공동묘지로 향한다.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끝간데 없이 펼쳐진 공동묘지다. 한 그루의 살구나무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가토(加土·무덤 위에 흙을 얹어 보수함)한 흔적이 있는 묘는 비교적 관리가 잘 돼 있다. 이곳 사람들은 벌초보다 가토를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의 묘비 앞에 고개를 숙이고 넋을 기린다. 詩人尹東柱之墓. 그는 시인으로 이곳에 누워 있다. 詩人이라는 말이 그의 생애를 온전히 말해준다.

/중국 용정=박성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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