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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복선군의 역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비상시 군사업무의 총괄 지휘소였던 체부가 역모의 거점으로 밝혀지면서 체부의 설치를 주장했던 윤휴 등 관련된 남인들이 줄줄이 사사됐다. 1689년 기사환국은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훗날 경종)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한 것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비판한 계기로 벌어졌다. 송시열의 상소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숙종은 송시열뿐 아니라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축출했다. 하지만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남인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계기로 서인의 잔여세력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숙종이 개입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다.
숙종이 통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붕당은 갈등하고 대립했을지언정 서로를 죽이고 상대방을 괴멸시키려는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효종 대에는 서인 재상 김육이 남인 대신 허적과 협력해 대동법을 추진했다. 현종 대에 남인 허목이 서인 송시열과 예송 논쟁을 벌였으나 이론 경쟁만 이어졌다.
하지만 숙종이 조정을 한 붕당 일색으로 채우는 환국정치를 단행하면서 공존이 깨져버렸다. 숙종은 환국 때마다 지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죽이고 실각한 붕당을 과도하게 탄압했다. 환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집권세력을 불충한 신하, 역심을 품은 신하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 착오나 잘못은 모두 상대 당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이런 숙종의 태도가 붕당들로 하여금 임금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붕당들은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는 데 집착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데 매달렸다.
서인과 남인이 원수가 된 1차적 책임은 숙종의 리더십에 있다. 서인과 남인은 학문적, 이념적 차이를 지닌 집단으로 국정과 민생의 주요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대안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만약 숙종이 정책이나 선명성 경쟁을 통해 누가 더 나은지 겨루도록 하며 붕당의 공존을 이끌었다면 조선 후기 정국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인조에서 현종 대에 구현됐던 붕당 정치 발전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렸다.
김준태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정리=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