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수없이 가슴 답답한 순간들이 온다. 그럴 때 나에게 따뜻한 위로와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공간, 한마디로 숨통이 트이는 그런 공간은 없을까. 연말연시를 맞이해 한 해 동안 지친 마음과 몸을 치유해줄 곳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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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지난겨울, 오랜만에 휴가를 냈다. 몇 시간을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담양. 그 전부터 푸른 대나무밭을 꼭 보고 싶었단다. 며칠 후 그녀의 SNS에 담양 죽녹원 사진과 함께 글 하나가 올라왔다.
‘바람이 불 때 대나무들이 부딪쳐 신비한 소리가 난다. 바람소리가 마음을 씻어줄 수 있음을 처음 배웠다.’
하얀 눈밭에 선명하게 서 있는 짙푸른 대나무 사이에서 A 씨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소리’였다.
“바람이 불면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잎이 떨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대나무들이 서로 ‘통통’ 부딪치는 소리가 나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는데 가슴속까지 너무 시원해지고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지금도 가끔 지치면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떠올려요.”
“그렇죠. 사람의 소리는 자꾸 분석하게 되고 복잡해질 때가 많은데 자연이 내는 소리는 뜻도 없고 리듬도 없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일 때가 있어요.”
그 무렵, 다시 읽고 있던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잊은 듯 마른나무처럼 앉아 있던 남곽자기를 보고 안성자유가 그 까닭을 묻자 남곽자기가 한 말이다.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인뢰)는 들었어도 아직 대지의 퉁소 소리(지뢰)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 대지의 퉁소 소리를 들었어도 아직 하늘의 퉁소 소리(천뢰)를 들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장자의 그 유명한 인뢰·지뢰·천뢰에 대한 이야기다. 철학적으로 여기서 인뢰와 지뢰는 사람과 자연이 내는 소리, 즉 인위적이고 제도적이며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유위의 것들을 말한다. 반면 천뢰는 그 소리들을 있게 한 무위의 소리. 근원의 힘으로 해석한다. 장자는 하늘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는 설정을 통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은 인위적 소리가 아니라 그것을 있게 한 근원의 소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를 ‘공간적’으로 재해석하면 A씨가 들었던 대나무 소리를 새롭게 풀이해볼 수 있다.
A씨가 귀로 들었던 건 대나무가 바람을 만나 내는 지뢰였다. 하지만 단순히 댓잎 흔들리는 소리 이상의 감동을 느꼈던 건 그곳이 담양이라는 특정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소리를 내지만 도시 건물 한켠에 심어진 대나무에서는 이런 치유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각각의 공간마다 축적 되어진 ‘땅의 역사’가 다르고 원래부터 있어왔던 땅의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내는 소리, 혹은 나뭇잎 풀잎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는 쉽게 변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공간 깊숙이 저장돼 있는 무음의 소리는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정서를 갖게 해준다. 바로 그 소리가 공간이 들려주는 천뢰다.
신화에서 절대자의 숨결이 불어넣어질 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천뢰를 품은 대지의 숨결이야말로 우리의 막혀 있던 숨통을 트이게 해줌으로써 생명력을 복원시킨다. A씨가 느낀 시원한 치유의 느낌 속에는 이 같은 천뢰의 울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는 끊임없이 복잡한 일과 회사의 소리, 그녀를 힘들게 하던 인뢰를 덮어버렸다. 숨통이 트이는 공간은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다. 저절로 내 소리의 볼륨이 낮춰지고 커다란 자연의 숨결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 소리에 공명했을 때 우리는 숨통이 트이는 깊고 후련한 숨을 내쉴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산’이다.
나의 인뢰가 작아지고 자연의 천뢰가 들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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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우주, 대자연의 한 점뿐인 내가 나를 너무 괴롭히고 살았구나. 이래도 저래도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 아웅다웅 힘들게 살 게 뭐 있나.’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깨달음은 스스로에게 안도감과 안정을 주고, 자연의 웅장함은 삶을 보는 스케일을 키워준다. 내가 작아질수록 마음은 온갖 것을 다 포용할 만큼 커지는 것이다.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우리는 삶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그곳에서 어쩌면 내 몸은 천뢰를 어렴풋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똑같이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도 인공의 건물 위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63빌딩이나 롯데타워 전망대에서 위로를 받는 사람은 드물다. 그곳은 데이트나 나들이 같은 이벤트와 관광의 공간일 뿐이다. 높은 건물에 올라갈수록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호연지기를 키우기는커녕 위축돼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화려한 고층빌딩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게 되고 그 공간의 누군가와 비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똑같이 높은 곳에 올라도 아래가 아닌 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공간과 공명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만들어진 빌딩과 공명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 단절감을 느낀다. 공간의 DNA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반면 똑같은 높이라도 산 정상에서는 많은 이들이 숨통이 트이는 시원함, 장쾌함, 안정감을 떠올린다. 대자연의 에너지가 가장 응축된 산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천뢰에 마음이 저절로 공명하는 것이다.
그 천뢰가 분명히 느껴지는 산이 있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마다 내가 자주 찾는 곳. 바로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이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참성단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간 천제를 지냈고 지금도 개천절마다 이곳에서 제를 지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마니산인지 궁금해진다.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 쟁쟁한 산들을 제치고 왜 해발 469m 외진 곳에 있는 이곳에서 국가적인 제사를 지냈을까? 이 질문은 마니산에 직접 가보고 나서야 저절로 풀렸다.
천제 지냈던 마니산에 느껴지는 천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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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이 어떤 이유로 그런 특별한 에너지를 갖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자는 마니산에서 볼텍스(Vortex)가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다. 볼텍스란 소용돌이 모양으로 나오는 지구의 자기장으로 전 세계에 21곳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이 미국의 세도나(Sedona)로 치유와 명상의 에너지가 가득한 곳으로 유명하다. 볼텍스의 개념은 아직도 검증 중이고 여러 가지 이견이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점이 있다. 에너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뻗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몸이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참성단 앞에 서서 몸에 힘을 빼고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땅을 느껴보면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몸이 나선형으로 돌기 시작한다. 나선형의 소용돌이 모양의 DNA를 가진 내 몸이 거대한 자연의 소용돌이와 하나되는 순간, 내 몸이 리셋되기 시작한다. 그동안 쌓였던 묵은 때와 묵은 생각이 강력한 파동에 날아가버리고 새로운 자연의 생명력이 온 몸에 가득 퍼진다. 나라 전체의 숨통을 트이게 했던 역사적인 이곳에서 커다란 자연의 에너지와 공명할 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소리를 조율하는 듯한 신륵사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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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계곡, 평야나 산이 만나는 접점은 풍요롭고 비옥하기 마련이다. 자연에서 물을 음(陰)으로 한다면 산은 양(陽)에 해당되는데 음과 양이 만나 조화를 이루면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모든 물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산이 너무 높거나 물이 크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균형을 맞추기 힘들다. 그런 곳은 관광과 모험의 영역이 될 뿐이다.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는 강과 평야가 적당히 어우러진 최적의 입지 중 하나이다. 그런데 여주에서도 왜 하필 이곳에 절을 세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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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는 봉미산을 배산으로 하고 양 옆으로 좌청룡 우백호라 할 수 있는 형국을 가진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울림을 발산하기에 가장 적합한 모양을 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강과 만나는 곳이 마치 작은 그릇처럼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모양은 티베트불교에서 사용하는 울림 주발을 닮아 있다. 놋쇠로 된 주발의 주둥이를 막대로 문지르면 오묘한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차크라’ 라고 부르는 인간의 에너지 센터와 공명하며 막힌 곳들을 뚫어준다. 주발을 울리며 스님들은 명상을 하고 몸을 깨워간다. 서구에서는 울림주발의 주파수를 따와 실제 소리를 이용한 심리치료에 사용하기도 하다.
신륵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주발 같다. 쉼 없이 밀려드는 강물은 주발을 때리고 문지르는 막대 역할을 한다. 하나 더 특이한 점은 강과 마주하는 절벽 위에 뜬금없이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석탑 바로 뒤에도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이 세워져 있다. 위치가 특이해 나옹화상의 다비처라는 상징성을 넘어 해석이 분분하다. 절을 향해 치고 들어오는 강의 흐름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강을 오르내리는 선박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모두 그럴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탑들은 마치 건반이나 현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처럼 신륵사만의 소리를 만들고 있는 조율사(tuner)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소한 차이일지라도 밀도의 변화가 만든 불균일성은 원래의 파장과 비슷한 또 다른 파장을 만들어 깊고 오래가는 여음을 만든다. 이런 절묘한 조율이 독특한 울림이 되어 과거에는 사람들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고 지금은 더욱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기운이 만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미묘한 떨림의 파장이 일어난다. 특히 신륵사처럼 단단한 화강암 지형 위에 터가 만들어진 곳은 부딪치는 단면이 놋쇠처럼 단단해 더 강하고 청명한 울림을 갖는다. 계수즉지(界水則止), 물을 만나면 지기(地氣)가 멈춘다는 말은 지기(地氣)가 또 다른 기운과 만나 부딪치는 곳에서 이전과는 다른 화합의 소리를 낸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소리가 바로 신륵사를 관통하는 천뢰이자 생명을 보살피는 치유의 소리이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땅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공간의 모습이 유지되는 한 그 상태를 유지한다. 고요한 자연의 울림은 우리의 청각을 넘어 몸을 공명시키며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한다. 무심히 강을 내려다보는 순간에도 내 몸은 자연이 내는 깊은 호흡과 함께 새로운 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몸 속 열독을 뚫어주는 제주의 만장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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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오랜만에 찾은 제주도는 몇 년 사이 너무도 유명해지고 화려해져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자연풍광이 있던 자리에는 온갖 종류의 상가가 들어섰고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전형적인 관광지가 돼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역시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한여름 뙤약볕에 올레길과 오름을 둘러보며 오랜 시간 걸은 탓에 발목이 부었고 허리도 아파왔다. 묵직한 몸과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문득 마지막으로 만장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간 지인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석주를 보겠다는 이유를 둘러댔다. 만장굴은 단체관광 시에 들려야 하는 필수 코스 정도로 여겨지는 곳이라 모두 시큰둥해 했지만 내 의지를 꺾진 못했다. 사실 나 역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날 지친 내 몸이 위로받을 곳을 찾아 안테나를 세웠던 것 같다. 그 안테나에 걸린 게 바로 만장굴의 천뢰였다.
단순히 생각하기에 만장굴처럼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동굴은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원래의 뜨거운 화기를 머금고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습도가 높고 창이 있거나 환기가 되는 공간도 아니니 그 안의 온도가 낮다 해도 오랜 시간 있으면 눅눅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것 같았다. 첫인상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울퉁불퉁하고 경사가 진 바닥은 물이 고여 걷기에 불편했고 어두운 간접조명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라 뚜렷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어슴푸레 보이는 벽에는 거대한 손톱으로 긁어 놓은 듯한 자국들이 패턴을 달리하며 층이 나뉘어져 있었다. 용암종유나 용암 유선 같은 용암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 무늬와 모양이 너무도 웅장하고 거칠어 어느새 벽에 코를 대고 관찰하며 찰박거리는 웅덩이들을 걸어가게 됐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오랫동안 벽과 천장을 둘러보는데도 눈이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됐다. 아니 오히려 점점 시려지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느껴졌던 냉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 뼛속을 파고드는 전율이 일었다. 에어컨이나 냉장고의 냉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밀도 있는 서늘함이었다. 이러다 감기가 들지 않을까 걱정돼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냉기는 더 이상 몸을 파고들지 않았고 오히려 몸 구석구석을 돌며 쌓여 있던 열독들을 공략해 나갔다.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고 체한 듯이 막혀 있던 숨통이 트여 호흡이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선한 체험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는 왜 이토록 참신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일까?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이 바로 용암동굴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산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석회동굴과 달리 만장굴은 용암에 의해 형성된 현무암질 동굴이다. 동굴의 기반암이 현무암으로 돼 있다는 말이다.
현무암은 과거 샤먼이나 인디언들이 애용하던 ‘치유의 돌’이다. 생리통이나 복통이 있는 여성의 배나 허리에 뜨겁게 달군 현무암 돌을 놓는다든지 돌을 넣은 물로 목욕을 하고 뭉치고 아픈 근육에 뜸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최근의 연구에서도 현무암이 숯처럼 정수나 정화의 해독작용이 있고 원적외선이 다량으로 방출돼 면역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제주도의 물과 공기가 유난히 좋은 건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라는 지리적 탓도 있겠지만 섬의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력(地力)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치유의 에너지가 가득한 현무암으로 된 동굴. 기본적으로 동굴은 에너지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압축된 공간이다. 산이나 물의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지거나 길을 따라 흐르는 곳이라면 굴은 오랜 시간 압축된 에너지를 통해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강력한 에너지 찜질을 시켜준다. 만장굴은 자그마치 개방 길이가 7.4㎞나 되고 폭이 18m 높이가 23m에 이르는 초대형 동굴이다. 그 안에 있다는 건 엄청난 크기의 현무암 덩어리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고 그곳에서 나도 모르게 자연치유를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공간은 그 소리를 듣는 이에게 더 큰 선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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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도시에 살며 온갖 사람과 마주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일상을 벗어나 자연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집안에 숨통이 트이는 공간을 만들어놓고 애용하고 있다. 안방과 안방 화장실을 이어주는 작은 공간이 그곳이다.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창이 없어 문을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곳. 그곳에 앉아 숯을 가득 채운 통에 물을 뿌린 후 숯이 물을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면 숯은 서늘한 공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천뢰를 들려준다. 그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굴 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옅어지며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평범한 아파트 속에 나만의 만장굴을 만든 것이다.
장자의 천뢰가 무위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면 공간의 천뢰는 내 몸이 그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는 능숙함은 공간 속의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든다. 공간을 다루는 기술은 생각보다 사소한 데 있다. 이곳이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지를 아는 것이 첫 번째 단추다.
아름다운 풍경과 웅장한 광경이 항상 우리의 숨통을 틔우지 못하는 것처럼 의외의 작고 소박한 공간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의 삶과 역사를 만드는 건 그 집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장자의 무위가 마른 나무처럼 앉아 세상을 잊고 있는 남곽자기의 모습으로 그려졌듯 시름을 잊고 잠시 앉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숨통이 트이는 공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연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더욱 멋진 천뢰의 음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신기율 - 과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약 15년간 철학자로서의 남다른 혜안으로 세상과 사람의 깊은 본질을 마주한 결과 국내 최초로 ‘직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현재 직관과 마음 치유 그리고 차(茶)를 결합한 기율다원(己律茶院)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2015년 베스트셀러 <직관하면 보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