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에 떠올리는 유배시절 추사의 방
비좁았지만 정신의 향기로 더없이 넓었던 방
![문태준 시인](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3/5b1ad573-f1a6-485d-bc69-6b28a30475e1.jpg)
문태준 시인
근일에 내가 혼잣말로 중얼중얼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적거(謫居)’라는 단어이다. 적거는 귀양살이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생소한 단어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에서 알게 되었다. 추사(秋史) 김정희는 1840년 9월 2일에 제주 대정에 유배되었다. 추사가 해배(解配)된 것은 1848년 12월 6일이었다. 추사는 꼬박 8년 3개월을 제주 적거지에서 살았다.
추사는 대흥사 초의 스님과 인연이 두터웠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내내 추사는 초의 스님과 교유했다. 추사는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입과 코의 고통은 여러 해가 지나도 그대로이고, 또 눈마저 눈곱이 낍니다. 사대육진이 마에 휘둘리지 않음이 없으니 한탄할 뿐입니다”라고 쓸 정도로 몸에 병환이 있었다. 초의 스님은 추사에게 목련꽃 봉오리 약재인 신이화(辛夷花)를 보냈고, 또 차를 보냈다.
![[일러스트=김회룡]](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1/03/83e7e2ee-8434-4e89-8ef1-a252b57c3d29.jpg)
[일러스트=김회룡]
나는 겨울의 이즈음에 추사의 제주도 적거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추사가 쓴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글씨를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추사는 차를 보내주는 초의 스님의 성의에 고마운 뜻을 전하기 위해 제자 소치의 인편으로 이 글씨 편액을 써서 보냈다.
일로향실은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는 의미이다.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던 때의 차의 향이 은은하던 방을 추사는 떠올렸을 것이다.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물을 평(評)하여 차를 다리던 때를 회상해보니 눈앞의 속진이 사라진 듯합니다”라고 쓰기도 했으니 말이다. 추사는 유배의 때에 ‘일로향실’ 외에도 ‘명선(茗禪)’과 같은 묵적을 걸작으로 남겼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추사의 글씨는 기름진 것을 덜어내고 골기(骨氣)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로향실의 글씨를 보노라면 추사가 자신을 단속하고 제어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일로향실의 공간을 염두에 둠으로써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서도 한가함을 얻으려 했고, 세속의 속됨과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일로향실의 공간은 높고 신성한 정신의 공간이 아닐까 한다. ‘일로향실’은 홀로 있으면서도 순수하고 자유로운 방이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 다스리는 방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이해하고, 자기 내면의 슬픔과 두려움의 수위를 낮추는 방이다. 이 방은 시야를 넓히는 곳이요, 자신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휴식을 주는 곳이다. 마치 석창포와 자금우를 길러 춥고 메마름을 견디려고 했던 법정 스님의 겨울 산방처럼. 그리고 이러한 방은 가상의 공간이든 실제의 공간이든 세파와 속진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추위가 혹독해지고, 잎들이 시든 이때에 적거지에 살았던 추사를 생각한다. 그 비좁았을 방을 생각한다. 비좁았지만 향이 가득했기에 더없이 넓었을 방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