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박정희 현판 논란에 볼모 잡힌 충무공 유물의 진실

화이트보스 2018. 1. 29. 10:43


박정희 현판 논란에 볼모 잡힌 충무공 유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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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세상만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놓고 시끄럽다. 이순신 장군의 15대 종부(宗婦)인 최순선(62)씨가 지난해 9월 "박정희의 현판을 내리고 300년 전 숙종이 내린 현판을 걸어라"고 문화재청에 요구하면서부터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 흔적 지워라"
15대 종부 "안되면 유물 전시 불허"

현판 논쟁 뒤엔 문중-종부 간 반목
현충사 "이러지도 저러지도…" 난감

허물 있는 역사라고 허물어야 하나
이순신 장군 묘소엔 한겨울 적막만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흔적이 왜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어긋난다는 게 최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반대하는 쪽은 "박정희가 세운 지금의 현충사도 나름대로 역사성을 갖고 있어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이순신 가문의 종부와 문중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과 불신이 얽혀 있어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가문의 종부와 종가가 충남 아산에 위치한 현충사(사적 제155호) 현판 교체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27일 관광객들이 현충사를 둘러보고 있다. 현판 교체 여부는 다음달 21일 문화재위원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충무공 이순신 가문의 종부와 종가가 충남 아산에 위치한 현충사(사적 제155호) 현판 교체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27일 관광객들이 현충사를 둘러보고 있다. 현판 교체 여부는 다음달 21일 문화재위원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영하 15도의 현충사는 얼어붙어 있었다. 24일 오전, 정문인 충무문에서 본전까지 가는 10분 동안 관람객은 찾기 힘들었다. 450m 길은 완만하지만 계속 오르막이다. 충의문을 넘어 본전 앞뜰로 들어서자 계단 위로 본전이 우뚝 서 있다. 처마 밑에 걸린 '현충사' 한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1967년 본전 완공 후 내걸었던 친필 한자 현판을 6년 뒤 바꾼 것이다. 
  
 1707년 숙종의 사액(賜額·임금이 내려보냄) 현판은 경내 남쪽 옛 본전(구 현충사)에 걸려 있다. 현판에 가득 찬 '顯忠祠' 글씨가 힘차다. 본래 1706년(숙종 32년) 창건된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2년 복원됐다. 독립운동을 하던 13대 종손 이종옥이 자금난에 빠지면서 충무공 묘소와 고택, 위토(문중 땅) 60마지기가 경매로 나왔다는 보도가 계기가 됐다. 1년 만에 1만6300원의 성금이 모였다. 2200여원으로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현충사를 재건했다. 이후 성역화 과정에서 현재 본전 앞뜰 자리에 세워졌던 당시 본전은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현충사 경내 남쪽으로 옮겨진 구 현충사 본전. 프리랜서 김성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현충사 경내 남쪽으로 옮겨진 구 현충사 본전. 프리랜서 김성태

#난감해진 현충사   
 최순선씨는 현판을 내리지 않으면 충무공 유물의 전시를 불허하겠다고 한다. 유물은 문화재청에 기탁된 상태지만 소유권은 종가에 있다. 15대 종손인 남편 고 이재국(1937~2002)씨가 사망하자 최씨가 넘겨받았다. 현충사 수장고에 보관된 최씨 소유의 유물은 모두 254건 389점. 국보로 지정된 난중일기(9점), 보물로 지정된 무기류·교지(敎旨)류(2건 22점)이 포함돼있다. 현충사는 평소 영인본·복사본을 전시하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해 진본을 특별전시 해왔다.  
  
현충사는 난감하다. 두 차례 연 자문위원회에서는 "구 현충사 건물과 숙종 현판이 일체성을 갖고 있어 지금 본전으로 옮겨 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본전과 현판도 나름의 역사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2월 21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한다. 원성규 현충사관리소장과의 일문일답. 
  
질의 :최씨가 왜 갑자기 문제를 제기하나.
응답 :우리도 답답하다. 문중(덕수 이씨 충무공파)은 현판 교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최씨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는데,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질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니.
응답 :최씨 입장은 언론 보도와 정부 청원 사이트 '신문고'에 올리는 민원으로만 파악하고 있다. 민원이 제기되면 최씨의 휴대전화로 답변 문서를 찍어 보낸다. 거주지는 모른다. 자문위원회에 나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숙종이 1707년 하사한 옛 현충사의 사액 현판(위)과 박정희의 친필 현판. 프리랜서 김성태

숙종이 1707년 하사한 옛 현충사의 사액 현판(위)과 박정희의 친필 현판. 프리랜서 김성태

#문중-종부 뿌리 깊은 갈등  
 현판 논쟁의 이면에는 문중과 최씨 사이의 뿌리 깊은 반목이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15대 종손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유산과 유물을 놓고 양측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소송을 벌이면서 문중은 종부의 '퇴출'을 선언했다.  
  
갈등은 2009년 폭발했다. 최씨가 사업을 벌이면서 담보로 잡힌 고택 부지 3필지와 산과 논 4필지가 경매에 나온 것. 최씨는 사기 등의 혐의로 동업자 한모(70)씨와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이순신의 고택이 78년 만에 다시 경매장에 나오자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결국 덕수 이씨 대종회가 매각 물건을 매입해 충무공파 종회로 넘겨주는 것으로 수습됐다. 이 와중에 최씨가 난중일기를 포함한 유물 130여점을 180억원에 거래하려 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문중의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최씨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재단법인 형태의 충무공기념사업회를 설립하기 위해 부동산개발사업을 하다 문제가 생겼고, 유물 거래 시도는 터무니없는 오해와 억측"이라고 해명했다. 
  
최씨는 지난해 간송미술문화재단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과 난중일기 공동 전시회를 기획했으나 문중의 제동으로 실패했다. 난중일기 원본을 반출하려 한다는 소식에 종회가 '유체동산 점유 이전 및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 아산시청 인근의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 사무실에서 이종천(83) 종회장을 만났다. 
  
질의 :최씨가 현판 문제를 제기했는데.
응답 :유물을 마음대로 못하게 하니까 억지 부리고 있다. 볼 것 없던 이 동네를 박 대통령이 이렇게 바꿔놨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대통령·국무총리·국회의장들 다 다녀간 곳인데, 왜색이 짙다고 (현판을) 떼라니 말이 되나. 일제 시대 깐 경부선, 호남선도 다 엎어야 하나.
  
질의 :난중일기 전시는 좋은 취지 아닌가.
응답 :그 여자(최씨)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 몇번이나 유물을 빼돌려 팔아먹으려 했다. (난중일기가) 그렇게 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질의 :세간에는 후손들 간 유물 싸움으로 비친다.
응답 :우리도 망신이다. 그 여자는 민족 성금으로 돌려준 문중 땅을 자기 멋대로 처리해버리지 않았나. 유물까지 도둑맞는 것은 막아야지.
현충사 내 전시관에 전시중인 이순신의 난중일기 복사본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현충사 내 전시관에 전시중인 이순신의 난중일기 복사본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최씨 "현판과 문중 문제는 별개"  
 최씨가 자신의 입장을 소상히 밝힌 것은 특정 인터넷 매체와 라디오와 한 인터뷰 정도다. 수소문해 얻은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최씨는 "그동안 나간 기사만으로 충분하다. 인터뷰는 사양하겠다"고 말했다. 
  
질의 :지금까지 나간 기사에 본인의 입장이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되나.
응답 :문중 관계 기사는 잘못된 것이 많다. 문중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 진실은 따로 있다. 나중에 밝힐 날이 오겠지.
  
질의 :현판 문제는 왜 제기했나.
응답 :현판과 관련해서는 내가 했던 인터뷰에 진실이 있다. 내가 이야기하려던 것은 문중과의 관계가 아니라 현충사와 현판 문제다. 여기까지만 하자.
  
 최씨는 인터넷 매체 인터뷰에서 "지금 현충사는 왜색 짙은 박정희 사당이며, 박정희가 칠해놓은 정치색을 벗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중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종회가 도의에 어긋나는 말을 해왔지만 참고 있다"고 말했다. 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등 종부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민족 성금으로 조성된 '구 현충사'를 현재 본전 자리로 다시 옮기는 방안도 검토해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최씨와 문중 모두 '민족 성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다. '민족 성금'이 지켜준 유물과 재산이 싸움의 대상이자 볼모가 된 현실. 허물 있는 역사는 허물어야 하는가. 소설가 이병주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일광(日光)에 바래 역사가 되기'엔 세월이 더 필요한 걸까. 충무공의 묘소는 현충사에서 차로 15분 남짓한 곳에 따로 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엷은 옷을 입은 봉토 주변 솔숲이 적막하다. 충무공은 어떤 생각이실까. 
이현상 중앙일보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간다] 박정희 현판 논란에 볼모 잡힌 충무공 유물의 진실